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영국 식민지였던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일어난 일이다. 본국 정부의 과세 정책에 분노한 시민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킨 와중에 영국군이 명령 없이 발포하여 민간인 5명이 죽고 여러 사람이 중상을 입었다. 1770년의 보스턴 학살 사건이다. 여러 군인들이 재판정에 섰다. 사건의 성격상 아무도 이들을 변호하려 하지 않았는데 존 애덤스라는 젊은 변호사가 나섰다. 영국에 비판적이던 식민지의 전도유망한 법률가. 나중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미국의 2대 대통령이 되었던 인물이다. 배신자로 찍힐 수 있는 부담은 물론이고, 자신의 평판과 가족의 생계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커다란 도박이었다.
학살 현장에서 과연 누가 ‘발포’라고 소리쳤는지, 그리고 사건 발생 전 성난 군중이 병사들을 먼저 도발하여 분위기를 폭발적으로 몰고 갔었는지가 심리의 핵심이었다. 애덤스는 배심원 앞에서 자기 일기장에 적어 두었던 글귀를 소리 높여 낭독했다. “만일 인간의 권리와 만고불변의 진리를 변호함으로써 독재 혹은 무지의 희생자를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면, 그 때문에 내가 설령 전 인류의 경멸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무고한 사람의 감사와 안도의 눈물만으로 나는 충분히 위로받았다 할 것이다.” 결국 병사 일곱이 석방되고 나머지 둘은 사형이 아닌 감형 선고를 받는 것으로 재판이 종결되었다. 애덤스의 투철한 직업정신과 능력이 대중에게 각인된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때문에 새삼 주목받은 사람이 있었다. 애덤스가 일기장에 적었던 글귀를 원래 집필했던 저자, 체사레 베카리아였다.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은 1764년 밀라노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전근대적인 범죄관과 형벌체계의 거대하고 어둡고 잔혹한 괴수와 맞서 싸운 이성의 상징이었다. 도덕적·종교적인 ‘죄’와 세속적인 ‘범죄’를 구분하고, 형벌의 목적을 새롭게 설정한 명저다.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은 1764년 밀라노에서 출간되었다. <범죄와 형벌> 덕분에 근대 범죄학과 형사정책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는 이 책을 ‘인류의 강령’이라 격찬하고 계몽주의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저서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범죄와 형벌>은 전근대적인 범죄관과 형벌체계의 거대하고 어둡고 잔혹한 괴수와 맞서 싸운 이성의 상징이었다. 도덕적·종교적인 ‘죄’와 세속적인 ‘범죄’를 구분하고, 형벌의 목적을 완전히 새롭게 설정한 명저다. 억측과 예단과 종교적 편견으로 생사람을 잡던 야만적 행형제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역사적 사건이었다.
범죄자에게 왜 벌을 주는가. ‘죗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서’가 제일 쉬운 대답일 것이다. 그러나 베카리아는 전혀 다르게 생각한다. 범죄자 개인에 대한 복수가 형벌의 목적이 될 순 없다. 범죄 행위로 인해 손상된 사회 전체의 선익을 회복하는 게 일차 목적이다. 따라서 형벌을 가할 권리는 최대다수에게 최대이익을 안겨주기 위한 권력 행사여야 한다. 흔히 벤담의 공리주의 테제로 알려졌지만 사실 이것은 베카리아가 만든 말이다. 또한 형벌의 목적은 타인의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범죄 억지 효과라는 개념이 나온다. 과거엔 죄와 벌을 개인의 문제로 다뤘지만, 베카리아 이후엔 죄와 벌이 사회문제로 전환된 것이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베카리아는 고문과 사형의 폐지를 주장한다. 고문은 “진실의 수치스러운 발견 방법”이고 “낡아빠진 야만적인 시대의 법적 잔존물”에 불과하다. 고통의 감각이 고문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면 잠시라도 그 고통을 면할 선택 외에 그 어떤 자유선택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문을 통한 자백으로 진실을 밝히는 건 불가능하고 불필요하고 부당하다. 사형도 마찬가지다. 범죄자를 처형한다고 사회 전체의 선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범죄의 예방 효과도 입증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복수심만 부추길 뿐 무엇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극형을 왜 시행하는가. 아무 실익이 없는 고통 주기에 불과하다.
여기서 계몽주의자 베카리아의 진정한 면모가 드러난다. 감정이 아닌 개명된 이익을 사회 전체 차원에서 추구하자는 것이다. 그랬을 때 개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엄한 처벌이 아닌 다른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공리주의적 동기로 인도주의적 효과가 발생하는 형벌관인 셈이다. 따라서 정의는 형벌에 있어 절대적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인간 사회의 유대를 보전하기 위해 필요한 수준을 넘어선 어떤 형벌도 그 본질상 부정의하기 때문이다. “공공복리를 열망하거나 공공복리를 우려한답시고 범죄를 저지른 시민들에 대해 법률로 이미 정해진 형벌보다 더한 처벌을 해선 안 된다.” 사회악의 리스트를 미리 정해 놓고 중벌로써 그것을 해결하자는 주장,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닌가. 응보적 정의관과 공리적 형벌관이 논쟁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또 다른 쟁점도 있다. 베카리아는 형벌의 가혹성보다 확실성이 범죄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성적 판단을 하는 잠재적 범죄자라면 엄한 형벌 때문이 아니라, 확실히 처벌받을 확률적 가능성이 높을 때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베카리아의 비판자들은 모든 범죄자가 계산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또한 범죄를 저지르면 확실히 처벌될 것이라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준다면 미셸 푸코가 우려한 자기감시의 내면화가 이루어진 사회일 수도 있다. 이런 논점들 때문에 학생들과 토론하기에 베카리아처럼 좋은 교재도 드물다.
한인섭의 유려한 번역으로 이미 우리에게 소개되어 있는 <범죄와 형벌>이 작금의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우선 기본적인 근대 형벌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경종을 울린다. 형벌은 어떤 경우에도 범죄자 개인에 대한 폭력행위가 되어선 안 된다, 사법정의는 공개적이고 신속하며 처벌은 꼭 필요한 정도만 최소한 행해져야 한다, 범죄와 형벌은 비례적이어야 한다, 범죄는 미리 법률로 정해져 있어야 한다. 이런 원칙이 우리 사회의 기준이 되어 있는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정치로 풀어야 할 것을 사법에 의존하고, 법원칙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정치로 농단하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베카리아의 공리주의는 보편적 공리주의다. 예를 들어 ‘귀족에 대한 처벌’이라는 장을 보자. 어느 사회나 권력자나 부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사회적 지위라 하더라도 “법에 의거한 인간의 원초적 평등을 먼저 상정”해야 한다. 법은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한 범죄자의 신분이 높을수록 범죄의 공적 피해가 커지므로 특권층의 처벌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 “형벌을 회피할 수 있는 모든 길을 차단함으로써 권력자가 법을 존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유전무죄를 떠올리지 않기는 힘들다.
법의 보편적 적용을 방해하는 ‘성역’이라는 개념 자체를 베카리아는 신랄하게 성토한다. 한 국가 영토 내에서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그 어떤 장소도 없어야 하며, “그림자가 몸체를 따르듯이, 법의 힘은 모든 사람을 따라다녀야 한다”. 만일 법적용이 미치지 않는 성역을 인정하게 되면 국가 내에 소주권 국가를 창설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법률이 그 권위를 갖추지 못하는 곳에 사회 전체의 정신과 대립되는 정신이 생겨날 수 있다.” 성역이 있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말이다. 베카리아는 인류 역사에서 이런 성역 때문에 대혁명이 터져 나왔다고 경고한다. 오늘의 한국인에게 이런 통찰은 세월호 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한다.
한번 더 강조하지만 베카리아는 규범적인 입장에서 남다른 정의감을 주창한 것이 아니다. 이성을 활용하여 냉정하게 죄와 벌의 문제를 고찰하자는 입장이다. 흔히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곤 하지만, 사실은 아직도 계몽과 몽매의 차원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간 문제들이 많다. 인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은 근대 인권의 기준점을 제시한다.
‘정상’ 정치행위에 관한 통찰을 마키아벨리가 제시했다면, ‘일탈’ 사회행위에 관한 대응은 베카리아의 공로다. 하지만 올해 <범죄와 형벌>출간 250주년에 관한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를 격변시키는 움직임 한복판에 범죄와 형벌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는데도 말이다.
공교롭게도 근대의 사상은 두 이탈리아 이론가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 ‘정상’ 정치행위에 관한 통찰을 마키아벨리가 제시했다면, ‘일탈’ 사회행위에 관한 대응은 베카리아의 공로다. 작년에 <군주론> 출간 500주년을 기념하는 움직임이 많았다. 그러나 올해 <범죄와 형벌> 출간 250주년에 관한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를 격변시키는 일련의 움직임 한복판에 범죄와 형벌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는데도 말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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