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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산얼병원의 추억 / 박민희

등록 2014-09-03 20:10

박민희 국제부장
박민희 국제부장
“감기네요, 링거 한병 맞죠.”

“어린애인데, 감기에 링거까지 맞아야 하나요?”

“한국 사람들은 링거 무서워하는데, 여기 환자들은 다 맞아요.”

둘러보니 소아과 진료실 곳곳에 돌이나 지났을까 싶은 아기부터 10여명의 아이들이 링거 주사를 하나씩 꽂고 있다. 의사를 설득해 간신히 링거 대신 주사를 맞히고, 약을 받으러 가니 비닐 쇼핑백 한가득 약이 나온다. 약값으로 수익을 올리려는 과잉처방이다. 진료비와 약값으로 한국돈 5만원 정도가 나왔다.

중국에서 일하던 시절, 감기에 걸린 초등학생 딸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가 황당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그 병원이 바로 산얼병원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제1호 외국인 투자 영리병원이라며 주요 투자 유치 사례로 선전해온 그 중국 병원 말이다.

산얼병원은 지난해 2월 제주도에 영리병원 설립을 신청했고, 정부는 지난달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연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산얼병원 승인 여부를 9월 중에 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최근 <한겨레>의 보도로 산얼병원이 한국 동네병원보다 훨씬 못한 수준인데다 모기업 산얼그룹의 자이자화 회장이 지난해 7월 사기대출 혐의로 구속됐다는 심각한 문제들이 드러나자, 보건복지부 등은 뒤늦게 상황 파악에 나섰다. 교민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산얼병원에 대해 현지에 주재관을 두고 있는 복지부가 기본적 사실도 파악하지 않고 있었다는 게 놀랍다. 한국에 영리병원의 물꼬를 트려는 무리한 성과 내기 정책이 빚어낸 허탈한 코미디다.

중국은 의료 영리화가 어떻게 의료 양극화와 황폐화를 불러오는지를 상징하는 정글이다. 사회주의 시절부터 허술했던 의료 시스템에 개혁개방 이후 시장화의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민영병원의 비중은 10%(환자 수 기준) 정도로 늘었다. 공공병원이든 민영병원이든 의료비는 비싸다. 환자들은 진료를 받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고 번호표가 암표로 거래되며, 의사들은 제약회사의 리베이트를 받고 약을 과잉처방해 수익을 올린다. 분노한 환자들이 의료진을 폭행하는 일들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반면 중국 의료계의 꼭대기에는 외국계 병원이라는 또다른 세계가 있다.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 주요 도시에는 미국계 의료기업 친덱스가 운영하는 허무자병원을 비롯해 싱가포르 파크웨이그룹, 홍콩의 글로벌 헬스케어 등이 운영하는 최고급 병원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감기 치료에도 수십만원 등 일반 병원의 10배 가까운 진료비를 받는다. 애초에는 외국인들을 위한 병원이었지만, 요즘은 부유한 중국인들이 주요 고객이다. 정부는 산얼병원 유치를 홍보하기 전에,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료 영리화의 문제들을 교훈 삼아야 하지 않을까.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외면해온 박근혜 대통령은 3일에도 규제개혁장관회의를 열었다. 올해 초에도 대통령의 ‘끝장 토론’ 등으로 규제개혁을 밀어붙이다 세월호 참사로 주춤했던 정부가 이제 ‘민생법안’이라는 새로운 포장을 더해 민생의 안전장치를 무력화시키는 법안과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의료 영리화와 관련된 서비스발전기본법안, 학교 옆 호텔도 지을 수 있게 한 관광진흥법 개정안, 분양가 상한제를 흔드는 주택법 개정안, 해운업체 지원을 위한 크루즈산업법안,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저탄소협력금제도 유보 등은 누구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것인가.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가 절실하게 공유했던 ‘사람이 돈보다 존엄하다’는 깨달음이 ‘규제 안 풀면 경제 망한다’는 위협과 공세에 내쫓기고 있다. 기억상실증을 강요하는 잔인한 정부다.

박민희 국제부장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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