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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50대, 그 남자의 문화 / 김영희

등록 2014-09-24 18:22수정 2014-09-24 21:40

김영희 문화부장
김영희 문화부장
얼마 전 교보문고의 통계를 보다가 좀 놀랐다. 최근 5년간 시·소설 분야의 구매층을 조사했더니 10~30대까지는 여성이 압도적이다가 40대에 격차가 줄어 50대부터는 남성의 비율이 더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시·소설을 읽는 중년의 남자라. 하긴 한두해 전부터인가, 같은 집에 사는 50대 남자가 나보다 문학책을 집어드는 경우가 잦아졌다. 하루키의 신작이야 유행에 뒤처지지 않겠다는 발버둥으로 보이지만, 쿤데라 전집이나 요즘 시집들까지라니. 올해 들어선 <정도전>에서 시작된 드라마 본방사수 습관이 <괜찮아 사랑이야>를 거쳐 지속되고 있다. “그리 책과 드라마를 보는데 도대체 그 감수성은 어디 가는지”라는 농담조 ‘타박’에도 아랑곳없이 푹 빠져 있는 모습이다.

음악영화 <비긴 어게인>을 혼자 또는 아이와 봤다는 중년 남성들이 주변에 꽤 있었다. 씨지브이 쪽에 물어보니 예매 비율은 20대 여성이 높지만 관람 뒤 평가 조사에선 50대 남성의 만족과 감동이 유독 컸다고 한다.

문학이나 영화뿐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올봄 ‘한국의 도교문화-행복으로 가는 길’ 전시 뒤 50대 이상 관객을 대상으로 한 심층조사를 처음 실시했다. 50대 남성 단체관람객이 드는 등 중장년 남성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게 계기였다.

이 박물관이 매주 수요일 오후 여는 박물관역사문화교실은 최근 몇년 새 참가자가 급증했는데 상당 부분이 남성 증가분이라고 한다. 지난주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에 대한 강의에 가보니, 대강당의 400석 좌석과 계단까지 꽉 차 로비에 설치한 화면 앞에 자리잡은 사람들도 있었다. 3~4할이 중장년 남성이다. 이렇게 이들이 문화현장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새 수요 찾기에 민감한 일부 문화계에선 ‘50대 남성의 재발견’이란 말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솔직히 ‘중년 아저씨 문화’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 그들의 여가생활은 등산이나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골프에 가끔 <명량>처럼 대박난 영화 관람이 고작일 것이라는.

실제 우리 아버지 세대까진 딱히 문화라고 할 게 없어 보였다. 정년이 보장된 직장에서 평생을 일하다가 은퇴한 뒤, 낮에 동네에 나가는 것조차 껄끄러워하는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를 주변에서 꽤 들었다. 수십년간 평일 이웃과의 일상에 익숙해졌던 아내들 사이에선 삼시 세끼를 챙겨줘야 하는 남편을 두고 짜증과 연민이 섞인 ‘삼식이 담론’이 유행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금 50대 베이비붐 세대의 어린 시절은 휴대전화도, 게임도 없이 책과 음악이 전부였던 때다. 이들은 특히 티브이의 대중적 보급과 통기타로 상징되는 70년대 대중문화의 세례 속에 10대나 20대를 보냈다. 87년엔 대학생 내지 넥타이부대였고, 구제금융 체제에서 평생직장이 환상임을 깨달았으며, 가계부채를 깔고 2006년 아파트 ‘상투’를 잡은 가장이기도 하다. 작가 김형경은 <남자를 위하여>에서 중년 여성들의 ‘빈 둥지 증후군’만큼이나 삶의 허망함에 사로잡히는 중년 남성들이 “불면의 밤을 통과할 때면 내면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커진다”고 했다.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층과 장년층 사이에 낀 중년의 남성, 그들의 가슴에 감수성과 사랑과 꿈조차 메말라버렸다고 난 단정했던 게 아닐까.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는 남자, 공원 벤치에서 책을 읽는 남자, 당신을 응원한다. 직장과 가족에게 외면받은 중년 프로듀서가 무명 싱어송라이터와 이어폰을 나눠 끼고 ‘애즈 타임 고즈 바이’를 듣던 <비긴 어게인> 속 그런 기적 같은 순간을 꿈꿔도 좋다. 당신은 충분히 자신의 문화를 즐길 자격이 있다. 이 가을, 아버지 그리고 남편의 손을 잡고 갤러리에라도 나가 보면 어떨까.

김영희 문화부장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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