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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사법체계 흔들어 정의를 세운 나라 2 / 박용현

등록 2014-09-28 18:20수정 2014-09-29 13:58

박용현 탐사·기획 에디터
박용현 탐사·기획 에디터
세월호 사건의 전모를 밝힐 힘 있는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이 못마땅한 이들은 ‘수사·기소권 부여가 사법체계를 흔든다’는 허구의 논리를 펴왔다. 세월호 유족들이 이 쟁점에서 한걸음 양보한 것은 저 논리가 맞기 때문이 아니라, 비정하게 버티는 새누리당의 힘의 논리에 막힌 탓이다. 이 힘의 논리가 기대고 있는 또다른 둔덕이 이른바 ‘세월호 피로감’이다. 사법체계 운운하는 논리가 왜 허구적인지 살펴본 지난번 글(▷ 사법체계 흔들어 정의를 세운 나라 1)에서 영국의 스티븐 로런스 사건을 소개했는데, 이 사건은 세월호 피로감이란 말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도 보여준다.

18살 흑인 청년 로런스가 인종차별주의자인 백인 불량배들에게 살해당한 게 1993년 4월. 사건을 둘러싼 진실을 밝히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기 위한 노력은 21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각종 진상조사만 7차례나 거듭됐다. ① 경찰의 부실·축소 수사로 범인들이 풀려난 뒤 여론의 비판이 일자, 97년 3월 경찰 자체적으로 수사의 적절성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9개월 뒤 “수사에 중대한 과오가 있었다”는 결론이 났다. ② 이듬해 내무장관 지시로, 전직 법관인 윌리엄 맥퍼슨 경이 지휘하는 본격적인 진상조사가 시작됐다. 1년 뒤 나온 맥퍼슨 보고서는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 조직이 인종차별주의에 물들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영국 형사법의 대원칙인 ‘이중위험 금지’(Double Jeopardy) 폐지를 비롯한 70개의 권고안을 내놨다. 진상 규명 노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③ 2006년 <비비시>(BBC)가 새로운 의혹을 보도하자, 독립적인 경찰 감독기구가 다시 조사를 벌였다. ④ 2007년에는 32명의 수사팀이 구성돼 법의학적 증거들에 대한 재조사에 나섰다. ⑤ 맥퍼슨 보고서 10년을 맞은 2009년에는 경찰의 인종차별 관행이 여전함을 지적하는 보고서가 나왔다. 2012년 드디어 범인들이 처벌을 받게 되지만, 진상 규명 노력은 그치지 않았다. ⑥ 이듬해 <가디언>에서 경찰의 유족 폄훼 공작에 대한 보도가 나오자, 총리가 직접 나서 즉각적인 조사를 지시했다. 조사 결과, 한 경찰관이 신분을 위장한 채 로런스 유족을 돕는 척하며 사찰을 벌인 사실이 확인됐다. 또 로런스 유족뿐 아니라 여러 단체들에도 경찰관들이 위장 침투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⑦ 이에 내무장관은 지난 3월 새로운 진상조사를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진실의 전모는 단번에 드러나지 않는다. 진실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저항이 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진실은 지치지 않고 부단히 노력하는 이들만이 다가갈 수 있는 비경이다. 로런스 사건에 대한 거듭된 진상 규명 노력은 범인을 처벌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경찰 조직 내에 만연해 있던 인종차별주의를 드러내고, 경찰의 위장 침투 작전이라는 예기치 않았던 치부까지 들춰냈다. 21년에 걸친 이 여정을 통해 영국은 한 걸음씩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총리와 장관들이 앞장서 진실 규명을 지시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언론의 노력도 끈질겼다. <가디언> 누리집에는 지금도 로런스 사건을 다루는 별도 페이지가 마련돼 있다.

세월호 사건은 아직 진상조사위도 구성되지 않은 상태다. 우리 앞에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 진실에 기대어 다시는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완벽한 안전사회를 만들어나가는 일은 기나긴 장정이다. 아이들이 구조됐더라면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또다른 아이를 낳았을 먼 미래로까지 그 길은 이어질 것이다. 아이들은, 그 길에서, 살아 있을 것이다.

박용현 탐사·기획 에디터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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