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 언론인
벌써 아홉번째다. 내 휴대폰에서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이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이름을 눌러봐야 통화가 될 수도 없지만 삭제하겠습니까에 선뜻 예스를 누를 수 없다. 6년 전 세상 떠난 내 오빠도, 따뜻했고 품위 있었던 친구의 남편도, 틈틈이 찾아와 일을 봐주던 장 목수의 이름도 나는 내 휴대폰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 번호를 눌렀다가 다른 사람 목소리가 들릴까봐 두려워서 눌러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울 수는 없다.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이 한 사람의 인격체 같아서 삭제하는 것은 누군가를 인생에서 완전히 버리는 것 같아 두렵다. 그런 사람들의 삶과 추억 그리움 하나하나가 모여 나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는데 아직은 버릴 수 없는 이름들이 있다.
지난주에 세상 떠난, 벌써 고인이라고 말하기 싫지만, 성유보씨가 내 휴대폰에서 오래오래 지울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아깝고 안타까워서. 문병 온 선배에게 살 만큼 살았다며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지만, 그렇게 급하게 죽음으로 이어질지는 본인도 주변 사람들도 예측하지 못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어떤 곳이든 그가 꼭 있어야 할 자리라면 어떤 험한 자리든 피해 본 적이 없는 그였기에….
40년 전인 1974년 박정희 유신시대에 동아투위, 조선투위가 결성되어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시작한 이래 한번도 그는 언론자유를 위한 현장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생업을 이유로 이런저런 불편을 이유로 뒤꽁무니를 빼도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회피해 본 적이 없었다. 언론자유를 혹독하게 옥죄어 오는 요즘의 우리나라 언론 상황을 생각하면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 모두는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에 뒤로 물러서 본 적이 없는 대신 평생 가난에서 도망가 본 적이 없는 그다. 가난한 나라에선 가난하게 사는 것도 애국이라고 했던 어떤 시인의 말을 빌리면 성유보씨는 그 철저한 실천가다. 해직 언론인 가운데 그의 살림살이는 항상 최하위 그룹에 속했다. 생업과 무관한 인생을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것을 버텨준 가족이 얼마나 대단한가.
70년대 말이었던 것 같다.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한쪽으로 몸이 씰그러져 있어서 병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0.8평의 감옥에서 본인은 운동을 한다고 감옥 안을 뱅뱅 돌았는데 왜 그랬는지 자기가 한쪽 방향으로만 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장기가 다 한쪽으로 쏠렸다는 것이다. 그만큼 자신이 융통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꼭 반대로 따져보게 되었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사물과 사건의 이면을 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와 한 직장에서 근무할 때 의견충돌도 많았다.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이 느릿느릿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 끊임없이 설득을 했다. 부인 장연희씨는 그리 느린 사람이 가긴 왜 그리 빨리 가냐며 한숨을 쉬었고, 같이 사느라 힘들었던 마누라한테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은 왜 안 하고 떠났냐며 눈물지었다. 모든 게 느린 것처럼 보이는 그지만 어떤 중대한 결정이나 행동에서 정작 느리거나 발뺌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이래 동아투위 위원들 가운데 저세상으로 간 사람은 모두 18명. 성유보씨까지 열아홉번째다. 40년 세월이고 또 앞으로 얼마나 그 세월이 계속될지 모른다. 한 사람이 열 걸음 가기보다 열 사람이 한 걸음 내딛고 가는 게 옳다고 한 그의 마지막 공식 인터뷰가 그의 유언이 되었다. 그의 삶의 모습 그대로다.
미안해요 성유보씨, 당신처럼 꿋꿋하게 살지 못해서요. 당신의 전화번호는 이 땅에 언론자유가 찾아오는 날까지 지우지 않겠어요. 내가 죽기 전까지 그런 세상이 오지 않는다면 당신 이름 내 휴대폰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언론자유의 상징이었고 당신의 이름과 언론자유는 동의어니까요.
김선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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