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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싸가지는 정치학이다

등록 2014-11-14 20:22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싸가지 없는 진보-진보의 최후 집권 전략>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14
싸가지 유무는 개인적 차이지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다. 하지만 타인에게 자기 의견을 설득해야 하는 사람에게 싸가지는 중대한 문제다. 정치인과 종교인이 대표적이다. 호감이 중요하다. 사실, 인품과 인간적 매력은 삶의 도구가 아니라 지향이어야 한다. 감정은 체현된 사상(embodied thought)이기 때문에, 이성보다 더 이성적이며 정치적이다. 효과도 훨씬 크다. 싸가지는 그 자체로 정치학이라는 얘기다.

싸가지. 원래 강원, 전남 지역 방언으로 최근에는 “내 사랑 싸가지”처럼 변화가 있지만(1장), 이 표현만큼 책의 내용과 부합하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이 과정은 말이 발산하는 감정과 인식의 상호 작용을 보여준다. 싸가지는 인성, 품성, 태도를 뜻하지만 그 이상의 미세하고 복합적인 어감이 몸 전체로 퍼지는 인지력이 있다.

강준만은 한국 사회의 콤플렉스, 콘라드를 빌려오자면 ‘암흑의 핵심’에 대해 수백 권의 책을 썼다(진짜 수백 권이다). 그는 생각의 장소성(locality)을 가진 드문 지식인으로 서구 이론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론’을 만들어온, 지식 생산 패러다임을 바꾼 탈식민주의자다. 찬반을 떠나 한국 사회를 파악하고 성찰하는 작업에서 그에게 빚지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될까.

<싸가지 없는 진보>는 현실 정치에 거부감이 큰 20%의 유권자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진보 세력에 대한 문제제기다. 이 책에서 상정하는 진보의 범주는 현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이다. 부제대로, 정권 교체를 염두에 둔 논리다. 책에 대한 논란은 크게 두 가지. 왜 더 ‘나쁜’ 여당의 싸가지는 문제 삼지 않는가, 그리고 여야 모두 도덕보다는 정치적 입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진보의 ‘이성 중독증’(91쪽)이라고 정확히 진단한다.

여야 문제가 아니더라도 강자와 약자, 중심과 주변 사이에 일반적인 법칙이 있다. 집권당에 비해 야당은 자원이 없다. 강자의 자원이 세속적인 것, 이를테면 돈과 미디어, 폭력(공권력)이라면, 약자는 보이는 자원만으로는 승부가 어렵다. 약자의 유일한 자원은 약자라는 위치 자체에서 나오는 도덕과 논리(언어)다.

피아간의 장단점을 아는 것은 싸움의 기본이다. 이를 무시하고 권력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원을 욕망하면, 그들과 다를 바 없거나 더 못한 집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때문에 여당의 부패나 비도덕보다 야당의 경우가 더 비판받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다’. 자원의 성격에 따라 사회적 평가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권력과 도덕, 양자를 모두 가질 수는 없다. 진보를 자칭하든 간주되든, 정치의식이 인격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헌신했다, 옳다는 독선이 인간성을 망칠 수도 있다.

누가 ‘진정한’ 진보이고 보수인지, 이들 중 누가 더 도덕적인지를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윤리는 각자의 위치와 이슈에 따라 다르게 요구된다. 저자의 인용대로 “우리는 모두 이중개념주의자”이며 “명사수가 되기 위해 이성애자일 필요는 없다.”(104~105쪽) 다만, 타인에게 ‘옮음’을 설득하려는 이들은 “정치는 참혹한 것과 불쾌한 것 중에서 선택하는 것”(132쪽)이고, 인간은 가치보다는 감정에 더 영향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성과 감정의 분리와 위계는 서구 철학의 낡은 산물이다. 감정은 최종 정치학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쓴 가장 큰 이유. 이 책에 대한 반론 중 “진보는 대안을, 야당은 정책을” 식의 의견은 습관적 발언이다. 이 통념이 과연 맞는 말일까? 나는 ‘서울 시장 이명박’ 시절에 서울시가 발주한 연구 사업에 조교로 일한 적이 있다. 그때 알게 된 것은 우리나라는 일본이나 캐나다 공무원이 하는 일을 정부 돈으로 ‘교수’나 ‘박사’가 대신 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책 마련은 공무원, 관료, 국회가 할 일이고, 공무원은 주어진 일만 하는 ‘철밥통’이 아니라 활동가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왜 그리 진보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은가. 사회적 대안 마련은 공동체 모두의 일이다. 대안 없이 나서지 말라? 서민의 일상 자체가 대안의 근거다. 진보는 싸가지만 있어도 충분하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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