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저급하거나, 얌체이거나 / 이봉현

등록 2014-11-30 18:48

이봉현 미디어전략 부국장
이봉현 미디어전략 부국장
라디오 광고가 불편하다. ‘지구 온난화로 살 곳을 잃은 북극곰에 눈물짓는 당신. 하지만 쓰지도 않는 코드를 줄줄이 꽂아 둬 전기를 낭비하는 당신. 결국 우는 것도, 울게 하는 것도 당신 아니냐?’고 묻는다.

아파트 경비원 관련 기사를 읽기가 거북해졌다. 경비원이 분신한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단지가 이번엔 수십명을 일시에 해고하기로 했다는 소식에 분개했다. 내년부터 경비원에게도 최저임금 100%가 적용돼 인건비 부담이 증가하자 인원수를 줄이려는 아파트가 많다 해서 흉을 봤다.

그런데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나도 ‘사용자’라는 게 새삼스럽다. 당장 다음달에 오른 관리비 고지서가 날아오면? 강남의 그 아파트처럼 경비원들이 노조라도 결성하면? 그래서 입주자대표회의에서 무인출입문 시스템으로 바꾸자고 설문지를 돌리면? 평소 단지 일에 무관심했던 나는 또 손도장을 꾹 눌러주지 않을까?

영화 <카트>를 보러 가야 할 것 같은데 요즘 뜨는 외화를 보고 말았다. 대형마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가 안쓰럽고, 그들을 소모품 취급하는 업주들이 밉다. 납품단가를 깎고 깎아 공급업체가 종업원을 줄이거나 월급을 동결하지 않으면 버텨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골목 어귀까지 진출해 동네 빵집, 슈퍼마켓, 세탁소를 초토화하는 대형마트의 행태에 핏대를 올렸다. 하지만 주말이면 단 100원이라도 싸고 물건 많은 대형마트를 찾아다니는 건 누구였던가?

경제학을 배운 이들은 곧잘 ‘역설’을 입에 올린다. 사전에는 ‘어떤 주의 주장에 반대되는 이론이나 말’이라고 나와 있는데, 보통 의도와 결과가 다를 때 사용한다.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인)가 어떻게 나올지 생각도 않고 ‘거룩한’ 뜻만 내세우는 정치권이나 진보진영을 조롱할 때도 이 말이 사용된다.

2011년 말 최저임금 기준을 10%포인트 올렸을 때 아파트 경비원들이 10% 실직한 것은 ‘최저임금의 역설’을 말해준다. 600만명이 넘어 임계치에 이른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자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정규직 고용조건의 유연화’를 들고나왔다. 이들을 정규직화하면 기업이 아예 사람을 뽑지 않아 그나마 있는 비정규직 자리마저 사라진다는 ‘역설’에 기댄다. 골목상권을 보호한다고 대형마트 의무휴업제를 도입하자 오히려 소비만 줄었다는 ‘역설’도 있다.

하지만 현실의 경제는 이기심에 의해 과학처럼 움직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게 다행이다. 사람들은 훨씬 다양한 선택을 한다. 이번에도 경비원을 줄이지 않는 선택을 한 아파트 단지들이 있다. 서울 하월곡동 ‘동일 하이빌 뉴시티’는 협력업체를 낀 간접고용 대신 직접고용으로 고용안정, 임금인상과 관리비 부담 절감을 동시에 이루었다고 한다. 서울 성북구 두산아파트 주민들은 전기를 절약해 조성한 수억원으로 내년 경비노동자 임금을 19% 올리기로 했다. 대형마트 대신 소비자와 생산자가 함께 이득을 보는 생협을 이용하는 조합원들이 급증하는 추세다.

모두 ‘착한’ 선택들이지만 단순히 착함만은 아니다. 가격이나 편리함과는 다른 가치를 택한 것이다. 경비원을 유지함으로써 더 안전하고 택배까지 보관해주는 넉넉함을 택한 것이다. 생협을 이용함으로써 먹거리를 덜 의심할 수 있다.

정책은 이기심과 이기심이 부딪치는 곳에서 시민들이 상생의 가치를 중심으로 덕성을 고양할 수 있게 설계해야 한다. 신뢰가 높은 사회가 좋은 것은 이런 보이지 않는 가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공무원연금 개혁은 국민과 공무원을 나누고, 복지는 무상급식과 무상보육 대상자를 나누고, 노동문제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나눠 대립시키는 박근혜-최경환류의 정책은 그래서 저급하다.

이봉현 미디어전략 부국장 bhle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