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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사랑, 그 사람의 눈으로 세상보기 / 이제훈

등록 2014-12-10 18:42

이제훈 사회정책부장
이제훈 사회정책부장
선생님이 숙제를 냈다. ‘노’로 시작하는 낱말 5개를 써 오라고. 초등 1학년인 아이는 공책에 이렇게 적었다. 노랑색, 노조, 노숙. 5개를 다 채우지 못했다. 노을, 노루, 노래 따위의 낱말은 떠올리지 않았다.

아이 아빠는 케이블 업체 씨앤앰의 정규직 노동자. 7월1일 계약 만료를 이유로 노동자 109명을 해고한 씨앤앰에 맞서 157일째 거리농성을 하고 있는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농성 중이다. 해고되지 않았지만, 해고노동자와 함께한다. 농성장 옆 한국프레스센터 앞마당 20m 전광판 위에선 씨앤앰 하도급 업체 노동자인 강성덕(37)·임정균(38)씨가 30일째 고공농성 중이다. 해고자 전원 복직 등을 요구하며. 임씨도 해고자가 아니다. “난 따뜻한 방에서 자고 있는데 해고 동지들이 점점 추워지는 길바닥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하니 매일매일이 지옥”이라며 올라갔다. “7월1일에 (해고돼) 나왔으니 5개월 됐다. 3개월 정도 지나니까 전기세도 가스비도 낼 돈이 없었다. 카드를 돌려막았더니 통장 압류가 들어왔다. 그때 누군가 봉투에 50만원을 넣어서 주더라. ‘급한 돈 먼저 쓰라’고. 그 돈으로 쌀을 샀고, 가스, 전기세를 냈다. 그 고마운 동지가 임정균이다.” 씨앤앰 하도급 업체 해고노동자 이경호씨의 말이다. 자정에서 새벽 6시까지를 빼고는 종일 뉴스 속보와 광고와 전자파가 난무하는 지상 20m 전광판 위, 말쑥하게 차려입은 엘리트 직장인이 드나드는 고층 빌딩 앞 거리 농성장에 겨울 칼바람만 부는 건 아니다.

11월23일, 전광판 아래에 사람들이 모였다. 김장을 담그러. 전국여성농민회 ‘언니네텃밭’이 (해고자 수만큼인) 절인 배추 109포기를,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돼지고기 수육을, 국내 최장기 비정규직 투쟁 당사자인 기륭전자 노조가 큰 솥을 들고 왔다. 갓 담근 김치에 수육을 곁들인 저녁을 들며 노동자들이 모처럼 웃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신경림 시인의 말처럼.

그 이틀 전인 11월21일 경기도 평택 쌍용차 노동자·가족 치유공동체 ‘와락’에서도 김장을 담갔다. 해고노동자와 그 아내 20여명이 함께. 절인 배추 300포기는 미군기지 이전 반대운동을 벌인 평택 대추리 평화마을에서, 천일염은 같은 처지의 보워터코리아 해고노동자들한테서 사왔다. 담근 김치의 일부는 씨앤앰 노동자들한테도 보냈다. 한 주 전인 11월13일 대법원이 “정리해고는 유효하다”며 가슴에 대못질을 한 터다. 2009년 대규모 정리해고 뒤 저마다의 우주였을 25명의 생명을 떠나보낸 그들한텐 ‘함께 있다’는 느낌이 절실하다. 그래서 눈물 반 웃음 반으로 김칫소를 버무린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문제를 풀려고 동분서주하는 남편(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기획실장, 해고노동자) 대신 요가 강사 일로 살림을 꾸려온 이자영씨가 11월15일 평택 쌍용차 공장 앞에서 열린 ‘파업 2000일 집회’에서 한 얘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파업 이후로 제 얼굴이 엉망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얼굴로 매일 요가 수업을 하는데도 요가원 회원들이 떠나질 않는 겁니다. 우리가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을 때 더 뜨거운 연대로 우리를 지켜준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요. 동고동락했던 많은 분들의 가슴에 사랑을 증명해주고 싶습니다.”

그렇다. 사랑이다. 잔혹한 시대의 냉기를 눅일 온기. “사랑이라는 게 뭔가? 그건 그 사람에 대해서 남들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그래서 그 사람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것, 즉 그 사람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다.”(김연수, <소설가의 일>)

이제훈 사회정책부장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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