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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개기고 삐지고 딴지 걸자 / 김의겸

등록 2014-12-17 18:38

김의겸 디지털부문 기자
김의겸 디지털부문 기자
국립국어원이 며칠 전 13개 단어를 새 표준어로 인정했다. 거기에 ‘딴지’ ‘개기다’ ‘꼬시다’ ‘삐지다’가 들어 있어 반가웠다. 평소 입말로 많이 쓰면서도 글에선 사용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맘껏 써보려고 한다.

말에도 계급이 있다. 표준어는 존중받고 나머지 말은 천대받는다.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다. 뭔가 점잖고 고상해야 할 것 같다. 행동거지도 그에 맞춰야 하니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얌전하게 따르게 된다. 이에 반해 사투리, 유행어, 비속어에는 현존의 질서를 부정하는 불온함이 깃들어 있다. 개기고 딴지 걸고 싶은 마음이 이런 말을 빌려 유통된다.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담고 있으니 ‘그걸 지켜보는 너’(임재범 <너를 위해>)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평소 완벽한 표준어를 구사하던 대통령이 ‘찌라시’란 말을 썼다. 정보지라는 표준어도 있고 ‘지라시’라는 외래어 표기법도 있는데 굳이 비속어를 입에 올렸다. 그 순간 청와대 공식 보고서는 ‘헛소문만 잔뜩 긁어모은 쓰레기더미’로 전락했다. 그리고 검찰이 뒷받침한다. 말이 사실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말이 사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표준어의 주인은 우리 ‘언중’이다. 아무리 천하고 상스러운 것으로 규정해도 우리가 입에 올리고 가치를 부여한다면 표준어가 된다. 3년여 전 ‘짜장면’이 그랬듯이 찌라시도 언젠가 표준어 세계의 시민권을 획득할지 모른다. 우리는 최근의 ‘땅콩 회항’ 사건을 통해 저항의 언어들이 발휘한 놀라운 위력을 실감하고 있지 않은가.

#개기다. 비행기에서 내동댕이쳐진 사무장처럼 개겨야 한다. 회사 사람들이 찾아와 ‘자진해서 내린 걸로 하자’고 요구하면 굳이 그 앞에서 ‘안 된다’고 버틸 필요 없다. 기자들 앞에서 “거짓 진술을 강요받았다”고 폭로하면 된다. 부당한 지시를 몰래 녹음하면 더 좋다. ‘잘리지 않아야 될 텐데…’라는 새가슴으로는 계속 핍박만 받을 뿐이다.

#딴지. 사무장은 국토교통부의 조사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있다. 그는 “조사 담당자들이 모두 대한항공 출신이고 결국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딴지를 걸고 있다고 한다. 거래를 할 줄 아는 사람인 것 같다. 이제 칼자루는 그가 쥐고 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딴지를 걸어야 한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좋은 건 조씨 일가뿐이다. 형사가 마무리되면 민사소송도 준비해야 한다.

#삐지다. ‘유일한 현장 목격자’인 일등석 승객처럼 삐질 줄 알아야 한다. 좌석 업그레이드 서비스를 받았다고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고작 모형 비행기와 달력에 넘어간다면 사람 꼴만 우스워진다. 언젠가 어느 대기업이 기자들을 만난 뒤 ‘소액 매수 가능자’라고 보고한 적이 있는데, 그 축에도 못 낀다. “이것들이 사람을 어떻게 보고…”라며 더 토라져야 한다.

#제일 중요한 건 ‘꼬시다’이다. “남을 속이거나 부추겨서 자기 생각대로 이끌다”가 말풀이다. 부정적이다. 하지만 속이지만 않는다면 없는 사람들끼리 힘을 모으는 방법으로는 제격이다. ‘주인’ 몰래 뒤통수를 치며 작당을 하자고 꼬드기는 거다. 이번 사건도 ‘블라인드’ 앱이라는 익명 게시판 서비스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이 게시판에 누군가 ‘뉴욕발 비행기 “내려”’라는 글을 올렸고, 그 글을 읽은 사람이 언론에 알린 것이다.

이런 저항은 굳이 심각해질 필요가 없다. 말 타고 총 쏘는 독립운동도 아니요, 화염병 던지고 징역 가는 데모도 아니다. 그저 눈꼬리를 치켜뜨고 무슨 행패를 부리는지 감시하면 된다. 보고 들은 걸 카톡이나 밴드에 올리면서 이죽거리면 된다. 사방에 그런 눈초리가 번득일 때 힘있고 가진 자들이 조심스러워진다. 비로소 사람을 사람대접한다.

김의겸 디지털부문 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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