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문화부장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고 이성복 시인은 말했다. 나도 아프지 않은 걸까. 지난 13일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안 70m 굴뚝에 오른 두 해고노동자의 기사를 읽으며 5년여 전이 떠올랐다.
경제부에서 자동차업계를 담당하던 2009년, 부서 이동 전 한 달 넘게 쌍용차 이슈에 매달렸다. 정부는 외면하고 산업계도 방관한 가운데, 노동자들이 ‘옥쇄파업’ 중인 공장에 특공대 투입 임박 소식이 들리던 때다. 그해 1월 용산참사의 기억이 또렷하던 당시 ‘사람이 다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마음이 취재기자들에겐 가장 절실했다. 회사 쪽 대표와 인터뷰하거나 기류를 취재하면서 평택 현장과 노조 취재를 맡은 사회2부 선배와 장시간 통화를 하곤 했다.
77일간의 공장 점거가 끝났을 땐 희생자가 없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뒤 5년간 26명의 죽음 소식을 들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긴박했던 그해 여름 하루하루를 생생히 기억하기에, 지난 몇년 동안 쌍용차 소식이 들릴 때마다 마음이 더욱 무거웠다.
올해 2월 서울고법은 쌍용차 구조조정의 근거가 됐던 회계보고서가 손실액을 과다추정하는 등 문제점이 있다며 정리해고를 무효라 판결했지만, 지난달 대법원이 이를 뒤집었다. 이젠 정말 길이 없구나 싶은 순간, 두 노동자가 굴뚝에 올랐다. 그것은 투쟁이 아니라 살려달라는 처절한 구조신호처럼 보였다.
이들을 지지하는 1인시위에 나선 배우 김의성이 <한겨레>와 한 인터뷰를 읽다 눈이 멈췄다. “나 같은 사람들이 법이 됐건 사회가 됐건 스트라이크존을 테스트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스트라이크와 볼 사이에 자꾸 공을 던져 스트라이크존이 조금이라도 넓어지게, 그래서 개인의 표현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나 이런 것들이 조금이라도 확장될 수 있게.”
대법원의 쌍용차 상고심에서 결론 자체보다 놀라웠던 건, 이런 첨예한 이슈를 전원합의체가 아닌 소부의 만장일치로 끝내버려 소수의견조차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지난주 헌법재판소는 정당 해산이라는 결정을 8 대 1이라는 압도적 숫자로 통과시켰다. 사법부는 보수의 요새가 됐다. 사회에선 성장 만능주의가 모든 이슈를 삼켜버린다. 김의성은 이런 질문을 던진 셈이다. ‘애초 누굴 위한 법이고 성장인가.’
사실은 그다음 말이 더 와닿았다. “분노라기보다는 연민, 외로움에 대한 연민 이런 게 사실은 핵심적인 동력이다. … 우리 사회가 이제는 그 정도로 고생한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구제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어떻게 보면 나이브하고 소박한 생각을 한 것이다.”
국가와 제도가 문을 닫아버린 지금, 그런 ‘나이브한’ 생각이 그래도 희망 아닐까. 한진중공업 사태를 호소한 배우 김여진이나 해고자가 복직되면 비키니를 입고 쌍용차 신차 앞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다는 트위터 글을 며칠 전 올린 가수 이효리 같은 이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손해배상과 가압류에 맞선 노란 봉투 캠페인에 정성을 보탰던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과 연민을 넓히는 데 문화가 구실을 했으면 좋겠다. 올봄 나온 정혜윤 피디의 르포 에세이 <그의 슬픔과 기쁨>을 읽으며 난 쌍용차 해직자들 하나하나에게 일터가 어떤 의미였는지 무엇이 5년을 버티게 했는지 처음으로 깊이 생각하게 됐다. 지난가을 문인들의 글모음 <눈먼 자들의 국가>의 호소는 세월호를 둘러싼 냉소와 논란을 부끄럽게 했다. 영화 <카트>는 내 많은 이웃이 살고 있고 우리 자녀 세대 대부분이 살아갈 비정규직으로서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해지는 사회는 결국 자신의 고통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추운 2014년이 지나가고 있다.
김영희 문화부장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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