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이레, 2004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이레, 2004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이 말은 상황에 따라 의논, 호소, 비난, 질문 등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간곡한 몸짓이 보태져야 무슨 뜻인지 가늠할 수 있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내가 상대방이 있는 곳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알 수 없는데다, 당도해도 그/녀가 그곳에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런데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Der Vorleser, The Reader)의 질문,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는 역지사지의 가능성을 묻는 것도 아니다.
케이트 윈즐릿의 명연기로도 잘 알려진 이 걸작은 생각의 전장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질문할 수 있다면, 이 소설은 가장 근접한 답이다. 이 작품은 역사란 실상, 역사의 파편이며 그 파편이 더 거창함을 보여준다. 홀로코스트 최전선에서 집행자로 일한 가난한 여성. 그녀의 생애에는 수많은 구조(계급, 인종, 성별, 앎…)가 교차한다. 교차로는 너무 복잡해서 십자로가 아니라 한 개의 점으로 보인다. 외로운 점. 글을 모르는 여자는 어떻게 사는가. 묵독(默讀)이 불가능한 인간에게 타인의 의미(책 ‘읽어주는’ 남자), 개인과 구조, 가해 집단과 피해 집단 내부의 차이(독일인 빈민과 유태인 인텔리 부자), 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사랑, 죄의식과 그리움이 뒤범벅된 평생의 관계… 독일 사회의 ‘과거 청산’ 노력 수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부러운 책이다.
주인공 한나는 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다. 이 사실을 평생 숨기며 산다. 그래서 홀로코스트에 가담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다. 회사원(지멘스)과 사무직 제안이 있었지만 수용소에서 유태인을 감시하는 거친 노동을 한다.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그녀는 문맹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대신 종신형을 택한다. 수치심은 그녀의 일생을 요약하지만 전범 재판 장면에서 논쟁을 주도하는 근거가 된다. 문맹인 학살의 하수인. 이 조합을 독자에게 묻는 것이다. 그녀는 가스실로 보낼 이들을 선별하는 작업에 관여했음을 시인한다. 판사는 “당신은 수감자를 죽음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녀는 당당하게 말한다. “아뇨,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전 사람들이 나가야(죽어야) 새로 온 사람들이 지낼 자리가 생기죠.” 당황한 재판장은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한나의 반박은 특정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지,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내는 업무를 거부한다면,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했을 것이다. 그녀의 저항 여부는 핵심이 아니다. ‘합리적’인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는다. “재판장님,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119~121쪽)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구조 속의 무기력한 개인’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죄와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학살 집단의 일부라는 사실이 아니다. 수용소를 비워야만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있다는 일의 차원이다.
세상은 그렇게 굴러간다. 삶은 옳고 그름이나 일의 가치를 기준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냥 사는 것,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 의미를 추구하는 삶? 신성한 노동? 이런 가치들은 소통하기 어렵다. 전쟁은 이런 것이 있다는 가정, 즉 정치경제적 이유와 “진리는 하나”라는 확신 때문에 발생한다.
살아있는 인간에겐 해야 할 일이 필요할 뿐이다. “삶은 지속된다(lasting)”는 제목의 책, 영화가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삶에는 목적은 없다. 의미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라는 반성은 필요 없다. 당연히 먹기 위해 산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는 우울한 인간만의 고민이 아니다. 이 질문만이 유일하게 쓸모 있다. 삶 자체가 의미라면 그걸로 만족, 일상의 괴로움과 외로움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라면 어떡하겠습니까? 한나의 질문은 삶이란 최악이자 최선이라는 본질을 폭로한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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