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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저들

등록 2015-03-27 19:44수정 2015-03-27 21:25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유착(流着)의 사상>
도미야마 이치로 지음, 심정명 옮김, 글항아리, 2015
어려운 글은 없다, 익숙하지 않은 사유가 있을 뿐이라는 내 주장이 맞다면, 주디스 버틀러와 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廊)가 대표적인 필자일 것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숨 막히는 구체성과 당파성. 특히 도미야마의 문장은 연결되어 있지 않다. 문장과 문장 사이가 운동한다. 그의 몸은 유(流)와 착(着)을 반복하면서 나아간다. 과정으로서의 글쓰기다. 말이 바로 실천이 되는 현장이 거기 있다.

그의 <전장의 기억>, <폭력의 예감>에 이은 3부작 <유착(流着)의 사상>이 출간되었다. 이 책 역시 구체성이 주는 밀도가 압권이다. 식민지 사람으로서 ‘나’의 의미를 고찰하는 3장은 루쉰으로 시작한다.(116쪽) 루쉰은 1926년 3·18 사건이 있던 날 “먹으로 쓴 허언(虛言)은 피로 쓴 사실을 감출 수 없다”, “피로 진 빚(血債)은 반드시 피로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2년 뒤 “글은 결국 먹으로 쓰는 것이다. 피로 쓴 것은 혈흔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글보다 더 감동적이며 더 직접적이긴 하지만 색이 변하기 쉬우며 사라지기 쉽다”고 했다. “피”와 “먹”은 비유가 아니다. 글자 그대로다. 현실은 말로 구성된다. 실체를 실체로 만드는 것도 언어다.

나는 누구인가. 모든 사람이 이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물음은 내 경험과 사회의 시선이 일치하지 않을 때, 타인이 멋대로 나를 규정할 때 솟아난다.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넌 누구냐?”라는 심문(審問)에 대한 일차적 반응이다. 식민자는 피식민자가 나는 누구인가를 스스로 상기하게끔 끊임없이 몰아붙인다.(124쪽) 이 질문은 면벽수도의 자기 탐구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면적인 폭력의 시작이다. 누구나 삶의 특정 시기에 이 물음이 요구되는 순간이 있다. 어떤 이들은 평생 이 질문과 씨름해야 한다. 다시 강조한다. ‘나는 누구인가’는 ‘넌 누구냐’이고, 그것은 ‘(나는 인간인데) 너는 뭐냐?’는 폭력이다.

저자가 일관되게 문제 삼는 것은 이러한 상황이 피억압자의 삶을 내내 뒤덮고 있는 신문(訊問)의 정치라는 사실이다. ‘여성’, ‘아줌마’,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이 아닌 사람, 식민지 사람은 이중 메시지 상황에서 늘 자기를 설명하라는 요구에 시달린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도미야마의 질문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가 아니다. 그는 억압받는 사람이 취하게 되는 방어 태세에서 ‘새로운 인간’의 가능성을 찾으려고 한다.

고향은 계속 움직이는 자아의 다른 이름. 유착(流着)은 두 지역 사이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두 지역이라는 전제는 없다.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흘러간다는 출향(出鄕)이 중요하다. 출향의 끝에는 돌아올 수 없는 고향이 부상한다. 고향은 이탈 속에서 등장하고 상상 속의 미래 안에서 다시 한번 등장한다.(88~95쪽)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강요하는 저들에게 어떻게 맞설 것인가. 어떤 방어 태세를 취하면서 무엇을 확보해 나갈 것인가. 가장 흔한 답, 가장 쉬운 답, 그러나 불가능한 현실은 진정한 자아 찾기(나를 잘 설명하기)다. 이는 ‘우리’를 기존의 사고에 묶어둠으로써 현실을 고착시키려는 식민자의 논리에 부응하여 “저들의 계통”을 강화시킨다. 상대가 이미 나를 정의하는 권력을 갖고 있는, 속수(束手)의 상태에서 무슨 말을 하랴.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다시 루쉰으로 돌아가자. 그가 “피”와 “먹”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몸을 믿었다. 실천을 믿었다. 먹은 변신이자 번신(飜身)한 몸이다. 피는 내가 아니다. 피가 고인 상태의 몸은 없다. 말하고 쓴다는 행위, “먹”이 곧 몸이다. 실천 과정에서 변화하는 몸이다. 먹의 가능성은 미래를,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현재로 만들 수 있다.(a transformative present, 29쪽) 도미야마는 유착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러한 현재 개념에 모든 것을 건다.

유착은 히트 앤 런(hit and run)이 아닐까. 치고 빠지기. 탈주(脫走). 탈주(奪走)면 또 어떤가. 정주는 주둔이 아니다. 정주는 항상 흘러가서 닿은 결과고, 또다시 흘러갈 수도 있다는 예감이다.(90쪽)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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