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박 대통령이 깊은 산에 내다버린 것 / 정남구

등록 2015-05-17 18:48

일본 나가노현의 가무리키산은 ‘우바스테(이모를 내다버림)산’이란 별칭으로 불린다. 살림이 어렵자 친어머니처럼 봉양하던 늙은 이모를 이 산에 버렸다가, 달빛을 보고는 곧 후회해 다음날 데려와 다시 모셨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고려장’ 이야기는 이 전설을 바탕으로 일본인들이 지어냈다는 설이 유력한데,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간혹 일어난다. 누구를 탓해야 할까?

2007년 6월 나는 ‘후레자식들의 나라’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손주들의 재롱이나 즐길 나이에, 저임의 일자리라도 얻기 위해 많은 노인이 경제활동에 뛰어들고, 상당수가 빈곤에 허덕이고, 노인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내용이었다. 표현이 과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가계는 경제적으로 독립한 부모나 자식에게 주는 돈이 포함된 ‘가구 간 이전지출’에 월평균 연금보험료(12만원)의 갑절인 21만원을 썼다. ‘후레자식’은 개인이 아니라, 노인 부양의 짐을 거의 개인의 책임으로만 맡겨두는 이 나라 시스템에 돌릴 일이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8년 기초노령연금이 도입됐으나, 그다지 달라진 건 없다. 65살 이상 노인의 경제활동참가율은 2005년 30.0%에서 지난해 31.9%로 더 높아졌다. 2013년 노인빈곤율(중위 소득의 50% 이하)은 48%에 이르고, 65살 이상 노인 10만명 가운데 64.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인자살률은 2000년 35.5명에서 2010년 81.9명까지 높아졌다가 그나마 조금 낮아진 것이다.

앞으로도 노인 빈곤은 심각할 것이다. 이대로 가면 우리나라 65살 노인 인구 비율은 2013년 12.2%에서 2030년 24.3%, 2040년에는 32.3%로 올라간다. 겨우 용돈 수준을 받는 지금의 국민연금으로는 이들의 생활을 제대로 지탱하기 어렵다. 게다가 심각한 ‘저출산’은 노인 부양 부담이 쉽게 완화되기 어려울 것임을 예고한다.

우리나라 가임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합계출산율)는 2013년 1.19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인구를 현상유지하는 정도인 2.1명을 한참 밑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인구연구센터 미코 뮈르스퀼레 등은 2008년 8월6일치 과학잡지 <네이처>에 실은 논문에서 1975년부터 2005년치까지 37개국의 인간개발지수(HDI)와 합계출산율의 관계를 분석했다. 최고치가 1.0인 인간개발지수가 0.85~0.90에 이르자 떨어지기만 하던 합계출산율이 다시 상승하는 경향이 공통되게 나타났다. 하지만 여기에도 예외가 있으니, 일본과 한국이었다. 여성이 일하는 환경이나 보육 환경의 정비가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는 나라다. 연구 대상은 아니었으나, 우리와 비슷한 성장 경로를 걸어온 대만(0.9). 홍콩(1.03), 싱가포르(1.26, 이상 2012년)도 사정이 비슷하다.

인구 고령화가 가속화하는 가운데 노인 빈곤은 당사자들의 고통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 경제를 내수부진의 더 깊은 늪에 빠져들게 할 것이다. 가난한 이들끼리 치열하게 일자리를 다투면서 임금 수준을 더 끌어내릴 것이다. 공적연금제도 강화와 보육·교육에서 공공의 구실을 키우지 않고는 이런 악순환을 벗기 어렵다.

정남구 경제부장
정남구 경제부장
이제는 근면·성실을 앞세워 노동자에게 장시간 노동을 요구하고, 수출대기업에 각종 보조금을 집중하는 힘센 정부가 아니라, 사회 곳곳에 필요한 손길을 펼치는 섬세한 정부라야 경제성장도 이끌 수 있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올리자는 여야 합의를 단칼에 베어버린 청와대와 박근혜 대통령의 반응은 그래서 절망적이다. 나라의 미래를 깊은 산속에 내다버리고는 홀가분하게 돌아선 자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정남구 경제부장 jej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