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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지금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면 / 박민희

등록 2015-05-20 18:31수정 2015-05-20 18:31

지난 8일 독일 베를린 의회. 오전 9시가 되자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 등이 조용히 걸어 들어왔다. 내빈 소개 한마디 없이 이들은 자리에 앉아 1시간 동안 역사학자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빙클러의 연설을 경청했다. 빙클러는 “히틀러의 부상은 독일 사회가 미국과 프랑스 혁명의 계몽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오랫동안 회의했던 결과”라며 “나치 범죄를 기억하면서 이제 독일인들은 죄책감보다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했다.

“역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기 위해”, 독일 지도자들은 역사의 교훈을 짚는 노학자의 연설을 경청하면서 2차대전 종전 70주년을 기념했다. 대신 메르켈 총리 등은 나치에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기념관 등을 찾아 머리를 숙였다. 역사에 대한 반성은 정치권력의 논리가 아니라 진실, 보편적 인권, 화해, 평화를 위한 성찰이자 실천임을 강조하는 메시지였다.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의 유대인 위령비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한 이래 독일 집권당도 보수-진보를 오가며 바뀌었지만, 과거사 반성은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이달 초 독일에서 만난 정치인, 학자, 시민운동가들은 사회 구성원들이 오랜 동안 치열한 토론과 노력을 통해 역사 반성에 대한 탄탄한 합의를 이뤄왔기에 정권이 바뀌어도 반성과 사과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진정한 반성이 독일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18일 ‘임을 위한 행진곡’에 ‘종북 딱지’를 붙이고 제창을 막은 정부의 조처 때문에 5·18 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식은 둘로 쪼개졌다. 유족 등 피해자들은 정부 기념식에 불참을 선언하고 광장으로 나가야 했다. 2009년 이명박 정권 때부터 이 노래를 사실상 금지곡화하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정권을 쥔 세력이 자신들의 이념에 맞춰 역사 뒤집기에 나선 불안한 신호다. 지난해 학술세미나에서 정근식 서울대 교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폄훼 시도의 상징적 표적”이라며 “2010년 일간베스트를 중심으로 5·18에 대한 극단적 폄훼가 시작됐고, 이후 계속되고 있는 5·18 폄훼의 상징적 전투가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한 비판이다”라고 지적했다.

민주화 요구 시민들을 국가권력이 학살한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성은 한국이 이룬 민주화와 진보의 상징이다. 미국 정치사회학자인 조지 카치아피카스 웬트워스공과대 교수는 <한국의 민중봉기>에서 5·18 민주화운동이 “어떤 관점에서는 파리코뮌보다 세계 민주주의에 미친 영향이 크다”며 아시아 각국의 민주화·노동 운동에 광주의 피플파워가 영감을 줬다고 지적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중국 대만 타이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등의 노동운동 현장과 시위에서 널리 불리고 있다.

우리는 독일의 과거사 반성을 칭찬하고 부러워하며, 일본은 왜 반성하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다.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촉구하고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동시에 우리는 같은 기준으로 우리 내부에서 벌어지는 반성의 퇴행, 시민들의 권리와 목숨을 짓밟을 수 있는 독재를 그리워하는 위험한 정치적 신호에 맞서야 한다.

박민희 국제부장
박민희 국제부장
1933년 독일 극우 학생들이 나치의 이념에 맞지 않는 책들을 불태웠을 때 널리 회자된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의 ‘지금 책을 태우면 나중에는 사람도 태우게 될 것’이란 경고는 이후 나치의 학살로 현실이 됐다. 지금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분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힘겹게 이뤄온 민주화, 시민의 권리, 역사 반성의 속절없는 퇴행을 수수방관하는 셈이다.

박민희 국제부장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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