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권을 위해 광고탑으로 올라간 50대 노동자가 그곳에서 소설을 읽는다. 그가 읽는 소설들에 자신과 같은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급기야 스스로 자신의 지난 삶을 소설로 쓴다. 그 글을 읽은 기성 작가는 그것이 ‘소설’에 미달한다고 지적한다. 노동자는 자신이 읽은 소설책들에 불을 지른다… 작가 손홍규가 <현대문학> 5월호에 발표한 단편 ‘타오르는 도서관’ 얘기다.
이것을 ‘문단문학’에 대한 거부와 ‘노동자문학’의 자기 선언이라 단언하는 것은 성급한 노릇일 것이다. 그러기에는 주인공이 놓인 상황과 그의 심리가 복잡하고 미묘하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오늘날 문학과 현실의 관계 및 그와 관련한 작가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실마리가 적지 않다.
함께 광고탑에 오른 후배 노동자 명호는 광고탑 농성장을 찾아 주인공과 대화를 나눈 교수 소설가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가 등장한 소설 몇편을 쓴 적이 있죠. 하지만 진짜 우리 이야기를 다루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 소설가가 특별히 비열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 시대에는 어떤 소설가나 마찬가지니까.”
이 시대 소설과 소설가에 대한 명호의 진단이 적실한지는 따져볼 문제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렇게 느낀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좀더 이어진다. “소설가들이 우리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자네는 왜 스스로 우리 이야기를 소설로 쓸 생각은 하지 않나.” “소설은 가망이 없으니까요.”
‘가망 없는’ 소설 대신 명호는 편지를 쓴다. 고공농성이 아홉달 가까이 이어지고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자 그가 유언처럼 쓰는 편지도 길어진다. 편지를 쓰는 명호 곁에서 정작 소설을 쓰는 것은 주인공이다. 그러나 작가 지망생 딸이 전달한 그의 글을 읽은 소설가는 말한다. “애석하지만 이건 소설이 아닙니다.” 사실은 글쓴이 자신 그것이 소설이 아니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 글은 “그저 살아온 대로의 삶을 쓴 것에 불과”한데 “내 삶에서는 일생일대의 사건이라 할 만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생일대의 사건’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도 잊히지 않는 장면은 있다. 광고탑에 오르기 몇달 전, 갑작스레 췌장암 판정을 받은 아내가 세상을 떴다. 아직 병원에 있던 어느 날 그가 미는 휠체어에 탄 채 병동 밖으로 나간 아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사람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간다죠. 그런데 여보… 어디서부터 하늘이에요?”
평생 책이라고는 읽어 본 적 없는 노동자가 광고탑 농성장에서 자신의 삶을 ‘소설’로 쓴 까닭은 어쩌면 그때 제대로 응대하지 못했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왜 아내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일까. (…) 그들은 왜 서로의 고통만을 곱씹은 채 서로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일까.’
오랜 농성에 몸이 상한 명호가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가고 주인공 역시 누구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지상으로 내려간다. 내려가기 전에 그가 한 일은 자신이 읽은 소설책 열두권을 불에 태우는 것. 그가 광고탑에서 내려간 까닭은 짐작할 수 있다. 죽은 아내에게 그가 이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여보… 나 이제 내려가네. 당신과 가까이 있고 싶어 올라왔는데 여기가 더 외로워. 저 지상에서만 당신을 온전히 기억할 수 있겠지.’ 그런데 책은 왜 불태운 것일까. 아니, 작가 손홍규는 왜 이런 자학적 설정을 한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가망 없는 소설’과 ‘소설 아닌 것’ 사이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하늘이냐는 질문과 마찬가지로, 이 질문에 답하기도 결코 녹록하지는 않다.
최재봉 문화부 선임기자 bong@hani.co.kr
최재봉 문화부 선임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