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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권혁웅의 오목렌즈] 25년 된 경로석

등록 2015-06-02 19:05


권혁웅 시인
권혁웅 시인
나는 방위로 군복무를 했다. 부대가 시외에 있어서 버스로 출퇴근했다. 도중에 여대가 세 군데 있었다. 여학생이 탈 때마다 멋지게 보이고 싶어서 책을 읽거나 창밖을 보았다. 여대생이 머리 짧은 방위를 그다지 남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안 뒤에는 내처 잤다. 어느 날 곤하게 자는데 누군가 머리를 툭툭 쳤다. 한 할아버지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젊은 녀석이, 자는 척 그만해.” 25년 전 일이다. 그때엔 자리를 지키는 젊은이들이 손가락질을 당했다. 요즘은 그 손가락질이 왕왕 어르신들을 향하는 것 같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임산부나 아기 엄마에게 막무가내로 자리 양보를 요구하는 노인 얘기가 드물지 않다. “표도 공짜로 타는 양반들이……” 흉보는 이들도 있다. 공짜표는 젊은이들도 나중에 예약해둔 것이니 탓할 일이 못 된다. 그냥 경로사상이 일반화된 증거라고 볼 수도 있겠다. 과거엔 양보하는 젊은이가 적어서 문제였지만, 이제는 양보하지 않는 젊은이가 적어서 생긴 문제라고 말이다. 그래도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 사회가 힘없는 이들을 무시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닐까. 그래서 고작 버스, 지하철 좌석에서나 대접받았음을 확인하는 이 시대 어르신들의 곤궁한 처지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 25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 할아버지에게 대답하고 싶다. 고맙습니다. 여학생들이 거들떠보지 않던 머리 짧은 방위를 젊은이라고 알아봐 주셔서. 너는 아직 피곤할 때가 아니라고 격려해주셔서.

권혁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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