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각자도생의 국가’라는 말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의 메르스 관련 행보를 접하면서 국민들이 실감하는 속마음이다. 이제 이곳에선 제 목숨 하나 부지하는 일이 난제가 됐다.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게 국가의 존재 이유라는 정의에 따른다면 완벽하게 막장 국가다.
이 정부는 세월호 때도 그랬지만 사고보다 이후의 대처가 늘 문제다. 화를 키우면서 모르쇠와 무능으로 일관한다. 불이 났다고 신고를 해도, 살인강도가 침입했다고 소리를 질러도 다른 사람들이 불안해하니 입을 다물라는 격이다. 상황이 다급해져 비명을 지르면 유언비어 유포죄로 처벌하겠다 윽박지른다. 실제로 잡아 가두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유리창을 깨부술 손도끼 하나는 가지고 여행길에 올라야 그나마 안심이 된다는 것처럼 현 메르스 상황에서도 내 목숨 지킬 방도를 제각기 찾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의학적 재난은 컨트롤타워에 대한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문가가 정보를 장악하고 있어서 일반인은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컨트롤타워가 제공하는 정보가 ‘우리가 살 방향’이라는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 이 정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신뢰를 스스로 깨버렸다. 그런 정부의 우왕좌왕과 무책임을 목도하면서 각자도생의 길을 찾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신뢰 인프라가 무너져버린 공동체에서 마지막에 나타나는 현상, 그게 바로 각자도생이다. 각자도생의 또다른 이름은 지옥도다. 혼자서는 입에 넣을 수 없는 긴 숟가락으로 혼자 밥을 먹겠다고 낑낑대는 아수라장이다.
2003년 사스의 맹렬한 기세로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 신자유주의 홍콩에서 각개약진하던 사람들은 정부의 무능을 뼈저리게 실감한 동시에 공동체의 중요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각자도생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각개전투는 치열한 전투현장에서 각 개인이 각자의 전투능력을 극대화해 고지를 점령하는 전투술이다. 특수한 상황에서 한시적으로 쓰는 극한의 전술이다. 그런 상황이 한시적이고 특수한 게 아니라 상시적이고 일상적이라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이라크 같은 특수지역에서는 수색대 뒤편에서 일련의 저격수들이 그 부대를 보호한다. 고도로 훈련된 전투부대원들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적 명제로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홀로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은 공포다. 두려움이나 불안이 아니다. 인류가 경험한 것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감정이라는 공포다. 말기암 환자는 자살하지 않지만 격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에이즈 환자나 왕따 피해자들은 자살하기도 한다. 혼자 고립된 채 살아내야 해서 그렇다. 각자도생은 모든 관계를 단절한 채 다른 이의 모든 고통을 외면한 채 제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다.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다.
극한의 땅 툰드라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번째 법칙은 조난당한 사람은 설령 그것이 원수처럼 지내는 상대라 할지라도 무조건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언제든 그런 위험에 처할 수 있고 그럴 경우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 각자도생은 자살행위다.
메르스 사태에서 이 정부는 국민들 마음속에 각자도생의 절박한 인식을 화인처럼 심고 있다. 그렇게 국가공동체의 신뢰 인프라가 무너지면 구성원들의 삶은 아비규환이 될 수밖에 없다. 각자 죽든가, 함께 살길을 모색하든가 둘 중 하나만 선택 가능해진다. 국민은 각자도생의 지옥에 있는데 정권만 홀로 살아남는 방법은 세상에 없다. 박근혜 정부에도 컨트롤타워라는 게 있다면 그 사실을 꼭 환기시켜주고 싶다.
이명수 ‘치유공간 이웃’ 대표
이명수 ‘치유공간 이웃’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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