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전 중국 칭다오의 호텔에서 공항으로 가는 길은 뻥 뚫려 있었다. 차량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가는 길 내내 500미터 간격으로 늘어선 경찰이 우리 일행이 탄 차의 운행을 위해 차량과 교통신호를 통제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제3회 동아시아문학포럼을 주관한 중국작가협회 그리고 칭다오시 정부의 ‘권력’은 그토록 시원하고 달콤했다.
일주일 일정 행사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면서는 메르스를 걱정했는데, 표절이라는 뜻밖의 복병이 먼저 알은체를 했다. 논란의 진원지인 작가 이응준의 글에는 내 이름과 오래전에 쓴 기사도 등장해서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작가 신경숙과 그의 대리인으로 나선 출판사 창비의 태도였다. 표절 대상으로 지목된 작품을 “알지 못한다”는 작가의 말은 믿기 어려웠고, 두 작품의 표절 혐의에 대해 “‘포괄적 비문헌적 유사성’이나 ‘부분적 문헌적 유사성’을 가지고 따지더라도 표절로 판단할 근거가 약하다”는 창비 문학출판부의 ‘입장’은 설득력이 약했다.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인 이시영 시인도 트위터에서 “창비 문학출판부의 보도자료는 매우 적절치 않아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시영 시인은 창비가 창작과비평사이던 시절 편집자로 출발해 부사장까지 역임한, 창비의 산증인과 같은 이다. 문제가 된 신경숙 단편 ‘전설’이 포함된 소설집 <오래전 집을 떠날 때>(1996) 역시 그가 그곳에 근무할 때 나온 책이다. 창비가 18일 저녁 “신중하게 판단하지 못한 점”을 사과한다는 대표 명의 성명을 내놓은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창비의 최초 보도자료가 적절치 않아 보인 까닭은 단순하다. 많은 사람이 표절로 보는데 표절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별다른 설득력도 없이 말이다. 창비의 보도자료는 ‘전설’과 미시마 유키오 단편 ‘우국’이 “성애에 눈뜨는 신혼 장면 묘사”라는 “일상적인 소재” 말고는 공통점이 없으며 그 묘사 역시 “작품 전체를 좌우할 독창적인 묘사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1936년 천황 지지 장교들의 친위 쿠데타와 1950년 한국전쟁 참전 장교 사이에는 물론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쿠데타 참가와 전쟁 참전이라는 대의와 신혼의 개인적 행복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개인’을 버리고 ‘대의’를 택하며 그 결과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공통점이 결코 작다고는 하기 어렵다. 게다가 문제가 된 문장들 사이의 ‘부분적 문헌적 유사성’조차 부정하는 안목은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그 문장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육체적 열락의 강렬함과 절박함은 이윽고 닥쳐올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서 한층 도드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비가 이렇듯 명백한 사실을 애써 부인하려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모두가 짐작하듯이 신경숙이 ‘잘 팔리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칭다오 공항으로 가는 길에 경험한 권력과 달리 한국 출판계의 권력은 곧 ‘돈’이다. 몇몇 잘 팔리는 작가와 그를 비호하는 주요 문학출판사의 평론가 편집위원 그리고 고액 문학상 운영을 통해 그들과 결탁한 언론으로 이루어진 ‘문학권력’은 실체가 없는 뜬소문이 아니다. 권력의 달콤함에 작가와 출판사가 초심을 잃었다는 것이 이번 사태의 핵심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면밀하게, 정직하게 응시하지 않고는 한국문학이 조금도 나아갈 수 없다”고 문학평론가 권성우는 페이스북에 썼다. 평론가 이명원도 “작가 신경숙과 창비의 대응 태도는 한국문학 전체에 대한 독자의 냉소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응준의 문제제기는 단순히 한 작가와 작품에 대한 고발을 넘어서 한국문학의 앞날을 가늠할 중요한 시험대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최재봉 문화부 선임기자 bong@hani.co.kr
최재봉 문화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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