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김정욱, 이재훈, 강재훈,
“커버스토리/쌍용차 해고자 김정욱의 고백”
<한겨레>, 2015년 6월13일
김정욱, 이재훈, 강재훈,
“커버스토리/쌍용차 해고자 김정욱의 고백”
<한겨레>, 2015년 6월13일
<시대와의 불화-이문열 산문집>(1992)의 제목은 ‘잡문집’이 될 뻔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에세이라고 하기엔 너무 과분하고 산문집은 좀 애매해 잡문집으로 하려다가 용례가 없어서” 산문집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염려한 대로 글에는 ‘장르’에 따른 위계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용(‘좋은 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지, 관행상 구분은 부차적이라고 생각한다. 시보다 시적인 광고 문구, 학술서보다 지적인 글이 얼마나 많은가.
문장으로서 신문 기사는 어떨까. 단지 옴부즈맨의 대상인가. 기사는 문학이나 비평이 될 수 없는가. 한국에서도 월터 리프먼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을까. <한겨레> 6월13일치 쌍용차 노동조합 김정욱 사무국장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원래 써두었던 글을 뒤로하고 이 글을 쓴다. 나는 그 글에서 견디기 힘든 긴장과 애매한 여운을 느꼈다. 글쓰기의 쟁점과 고민을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이슈에 대해 쓰고 싶다. 사실 그대로 다 쓸 수 없을 때 어디까지 쓸 것인가와 그 기사에 대한 일반적인 여론, “가슴 아팠다”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글쓰기의 기본 의제이자 영원한 좌절은 생각과 표현의 차이일 것이다. 쓸 만한 생각이라는 물질을 갖는 과정(삶)도 어렵지만, 아이디어가 있어도 괴로움은 멈추지 않는다. 능력과 검열이 대표적이다. 글을 쓸 때 표현력의 한계는 한계가 없다. 내 생각은 ‘○’인데 글은 ‘@%?$2&ㅠ’… 이렇게 나온다. 국가보안법은 차치하자. 그 인터뷰는 검열과의 승부를 치열하게 보여준다. 사회적 검열과 자기 검열은 권력과 언어의 핵심적 문제다. 독자로부터 자유로운 글은 없다. 좋은 필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와 사회적 인식 사이에서 최선을 다해 협상에 협상을 거듭한다. 글은 전선(戰線)이다. 사실은, 절대로, 거저 사실이 되는 법이 없다. 사실은 확보하려는 노력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다. 폭탄이 터지는 가장 가까운 곳, 몇 밀리(㎜) 앞까지 다가가 독자를 설득하고 ‘적’을 공략하는 일이다.
누구나 자기 생각을 눈치 보지 않고 가지런히 써서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망상이 있다. 나를 포함해 대개는 아무것도 못 쓰거나 죽을힘을 다해도 30% 정도? 아니, 그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글짓기(building)는 장인의 일이다. 그렇다면 진실 보도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종합일간지의 기자는 사실의 몇 %를 쓸 수 있을까.
그 글을 예로 든다면, 굴뚝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많은 이들이 사실을 목격했고 알고 있다.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된다. 글 쓰는 사람은 거친 그물망(검열)에서 발버둥치는 가련한 물고기와 같다. 쓸 수 있는 최대치를 정하는 것도 힘들고 이를 달성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 김정욱 국장은 인터뷰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한다. 나는 망설임이라고 느꼈다. 망설임은 양심과 성실성, 타인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다. 인터뷰가 자기 홍보가 아니라 글쓰기의 정치적 윤리적 격전장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조직, 동료, 자신의 부족함을 말하는 것은 고통을 공유하는 일이다. 강함과 명예는 고통을 통제하는 능력이 아니다. 그들은 조현오 현상(‘쌍차 문제’는 잘못된 표현이다)이라는 한국 사회의 야만과 글로벌 자본의 유탄을 맞았다. 그 상흔은 우주를 떠돌다가 결국 우리에게 도착한다. 그것이 사회다. 운동과 사회 사이의 경계가 뚜렷할수록 양자 모두 부패한다. 정확히 말하면, 영웅주의와 불성실하고 나쁜 세력이 득세한다. 기사에 대한 반응 중 “사회운동에 대한 새로운 논의 같은데 뭔가 애매하다”는 평이 있었다. 당연한 일이 아닐까. 이제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애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그 기사가 아프지 않았다. 읽기 쉽지는 않았지만 이런 이야기가 기사화될 수 있다니, 어떤 뿌듯함이 있었다. “나는 굴뚝에서 망가졌다”는 헤드라인으로서는 불편하지만, 인간의 경험으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 아니다. 경험 전후, 변화가 없다면 무서운 일이다. 그는 강자의 이미지를 전복시킨 의미 있는 저항을 했다. 사회운동은 약자들의 연대다. 사회는 그 과정에서만 변화한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