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무 스포츠부장
편집국에서
얼마 전 스포츠부로 한 독자가 항의전화를 해 왔다. 요지는 이렇다. “<한겨레> 스포츠면에 골프 기사가 너무 많다. 창간독자인데 배신감을 느낀다. 반환경적이고 반생태적인 골프 관련 기사를 그렇게 크게 쓸 수 있느냐. 왜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택견 같은 기사는 쓰지 않는가?”
골프 기사가 어쩌다 크게 나가는 날이면, 으레 이런 내용의 전화가 편집국으로 걸려온다. 난데없이 전화를 받고 한바탕 ‘곤욕’을 치른 다른 부서 동료들은 “정말 우리 골프 기사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니에요”라며 한마디씩 던지고 간다. 이럴 때의 난감함이란 ….
어떤 기사들이 나갔나 보면 대개 이런 것들이다. ‘김주연 유에스여자오픈 우승’, ‘최경주 3년 만에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정상 정복’ …. 물론 때로는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나, ‘골프여제’ 아니카 소렌스탐 이야기도 크게 다룬다. 7일치에도 프로로 전향한 미셸 위 기사를 ‘기대반 우려반’이라는 내용으로 크게 썼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지난해 초인가 스포츠면 단신란에 ‘한국골프장경영협회 정기총회 개최’라는 소식을 짤막하게 내보냈다. 골프장경영협회는 현재 전국 172곳 골프장이 회원사로 가입해 있는 단체다. 이들 골프장 사장들이 일년에 한 번 모여 회장도 뽑고, ‘그린피 인상 자제’ 등 중요한 결정도 내리기 때문에 다뤘다. 물론 한겨레 취재영역의 외연을 넓히려는 의도도 있었다. 며칠 뒤 그 쪽 관계자를 만났는데, 한겨레에 자기네 기사가 실린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며 대단히 ‘감격’해 하는 것 아닌가? 간혹 골프협회나 업계 쪽 사람들 만나면 한겨레도 골프를 다루느냐, 심지어 왜 그렇게 골프에 적대적이냐며 고개를 흔드는 경우도 있었다.
몇 해 전 일이다. 한창 가뭄으로 농촌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한 논설위원이 물을 펑펑 써대는 골프장은 임시휴장해야 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쓴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당시 골프장 쪽 관계자가 전화를 걸어 “골프 치는 사람들이야 자제할 수도 있지만, 골프장이 문 닫으면 캐디나 골프장 종사자들은 어떻게 먹고 살라고 그런 글을 싣느냐”고 강하게 항의한 적도 있다.
골프와 한겨레. 확실히 어딘가 성격이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환경론자들은 골프는 좁은 땅덩어리의 한국 풍토에 전혀 맞지 않는 스포츠라며 ‘골프 망국론’을 외친다. 한겨레 논조도 대체로 이와 맥을 같이한다. 농약 과다살포에 따른 환경오염 등도 심각한 문제로 거론된 지 이미 오래다. 멀쩡한 산이 통째로 없어져 골프장으로 바뀌니 환경론자들이 그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수요보다 턱없이 모자라는 공급을 채우기 위해 지금도 골프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골프연습장도 동네마다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올 초 문화관광부는 국외 골프 관광으로 인한 국부 누출을 막겠다며 골프장 건설 규제를 대폭 완화했고, 대중골프장을 많이 만들도록 하겠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 부부도, 이해찬 국무총리도 골프를 즐겨 친다. 지난 한 해 골프장 내장객은 사상 처음 연인원 1600만명을 넘어섰다.
그렇다면 골프인구가 왜 최근 몇 해 사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일까? 골프장경영협회 쪽에 물어봤더니 “박세리 효과도 있었지만, 크게는 소득수준이 상승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그러나 절박한 생계를 해결하려고 길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갈수록 늘고 있으니, 확실히 한국사회는 ‘20 대 80’의 사회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골프에 관한 한 한국사회는 분명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있다. 친골프론자와 반골프론자들, 그리고 골프를 치는 사람과 못치는 사람들. 이 사이에서 골프라는 스포츠를 다뤄야 하는 한겨레 스포츠부 데스크는 늘 그 수위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김경무/스포츠부장 kkm100@hani.co.kr
골프에 관한 한 한국사회는 분명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있다. 친골프론자와 반골프론자들, 그리고 골프를 치는 사람과 못치는 사람들. 이 사이에서 골프라는 스포츠를 다뤄야 하는 한겨레 스포츠부 데스크는 늘 그 수위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김경무/스포츠부장 kkm10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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