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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끝을 보고야 만 자의 씁쓸함

등록 2015-06-26 20:13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근대초극론>, 히로마쓰 와타루(廣松涉) 지음
김항 옮김, 민음사, 2003
일본 교토의 리츠 칼튼 호텔 지점 건물은 소박하다(안 들어가 봐서 내부는 모른다). 몇 걸음 건너 맞은편에 작은 가게가 있다. 이 도시는 간판이 크지 않아서 무슨 사무실인지 한 번에 파악되지 않는 곳이 많다. 쇼윈도에 수십개의 ‘예술 접시’가 사각형으로 전시되어 있어서 처음엔 당연히 미술관인 줄 알았다. 그다음엔 화원, 한의원인 줄 알았다가 동물 병원으로 ‘판명’되었다.

내게 그 가게는 ‘일본’을 상징한다. “일본인은 본심을 알 수 없다”는 혼네(ほんね, 속마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잘 모르는 나라’다. 일본에 대한 무지는 식민성과 관련이 있다. ‘해방’ 후 점령자가 교체되면서 남한은 미국의 51번째 주를 자처, 그들과 동일시하면서 일본으로부터의 탈식민 투쟁(성찰과 공부) 대신 손쉬운 비하를 택했다.

<근대의 초극(超克)>은 1920~1945년에 걸친 근대성 극복을 주제로 한 일본 지식계의 논쟁을 마르크스주의 석학 히로마쓰 와타루가 해설한 유명한 책이다. 비서구 일본의 입장에서 서구에서 시작된 근대성(민주주의, 자본주의, 자유주의)을 극복하자는 논의는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근대 자본주의는 서구에서 시작되었지만(모더니즘) 아시아의 일본에서 더 발달했다(포스트/모더니즘). 공간과 시간의 불일치.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하는 지름길은 일본 연구라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로 진입한다)는 개화기 일본의 강박이었다. 일본은 추월에 성공했다. ‘원본’인 서구를 초과 달성한 것이다. ‘근대의 초극’ 논쟁은 제국이 되고자 했던 일본이 자신을 알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수십권의 전집을 낼 만한 걸출한 지식인들이 탄생했으며 일본 특유의 인문학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일본은 따라잡으려는 대상을 치열하게 논파했다. 유럽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가 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다. 서구가 비서구를 규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서구를 열심히 연구하다 보면 질문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를 만든 이들을 거쳐야 한다. 비서구, 여성, 장애인… 모든 타자들에게 인생이란 이렇게 멀고 복잡한 우회로이다. 이는 피식민자의 자기 찾기는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 자신을 다시 구성하는 과정임을 깨닫게 해준다.

근대 유럽의 철학과 역사, 미술, 음악에 두루 정통했던 고바야시 히데오는 이렇게 말했다. “근대의 초극을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근대가 나쁘니까 다른 무엇인가를 가지고 오자는 이야기가 아니므로 근대인이 근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근대에 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일본) 고전으로 통하는 길이, 근대성의 벼랑 끝이라고 믿는 곳까지 걸어가서야, 열렸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히로마쓰의 해석은 “그의 말에는 서구 문명의 밑바닥을 보고야 말았다는 자부라기보다는 오히려 적막감을 동반한 안도감 같은 것이 존재하며, ‘보고야 만 자의 씁쓸한 감정’이 묻어난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국수주의적 자만심이 아니다. 깨인 상대주의, 단순한 회의주의가 아니라 어디엔가 깊게 빠졌다가 나온 사람 특유의 고뇌와 적막감이 함께하는 깨달음이다.”(184쪽)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받는 자기 개념과 싸워야 하는 타자로서 울컥하지 않을 수 없는 구절이다. 무엇인가에 깊이 빠졌다가 나온 사람 특유의 “고뇌와 적막감”. 나도 처음 여성주의를 공부할 때 그랬다. ‘남자들의 책’(더구나 동서양!)을 다 읽어야 한다는 조급함과 강박이 지나간 후 찾아오는 허탈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극복, 사랑, 혐오… 목적이 무엇이든 상대를 알기 위해 “벼랑 끝까지 걸어간” 적이 있는가. 나는 한국 사회에서 학문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주류 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약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의문에 뛰어들 수 있는 인식론적 특권. 끝을 보고야 마는 것은 최고의 저항이다. 자신을 해명하기 위해 끝을 보려는 이들은 비교나 절충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 “끝을 보고야 만 사람의 씁쓸함”. 진실은 달콤하지 않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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