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의 외교 ‘도박’은 냉전의 역사를 바꿨다.
1971년 7월11일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은 베이징을 극비 방문해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만나 양국 화해와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문제를 이틀에 걸쳐 논의했다. 나흘 뒤인 15일 닉슨 대통령은 이 사실을 발표해 세계를 뒤흔들었다.
두 나라는 한국전쟁에서 마주 싸운 적국이었다. 당시 중국은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는 홍위병들로 상징되는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있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중국에 대한 핵 공격을 위협했고, 중국도 이때는 이미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숙적인 두 나라가 공동의 적 소련에 맞서려는 전략적 계산으로 손을 맞잡으면서 역사의 물줄기는 변했다. 미국은 결국 소련 붕괴라는 전략적 목표를 이뤄 냉전을 끝냈고, 중국은 강대국의 꿈을 향한 첫걸음을 뗐다.
44년 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미-중 화해에 버금가는 역사를 썼다.
20개월 넘는 끈질긴 인내의 핵 협상으로 13년간 끌어온 이란 핵 문제를 해결할 돌파구를 만들어냈다. 더 크게 보면 이란 이슬람혁명 이후 36년간 최대 안보위협으로 꼽혀온 이란과의 관계에서 새 시대를 열게 됐고, 중동 정세와 미국의 대 중동 정책, 핵 비확산 체제, 전세계 에너지 시장 등에 큰 변화를 예고했다.
얼마 전까지도 이란 핵 협상 타결은 불가능해 보였다. 오바마 대통령이 미얀마, 쿠바 등 적대국들과 화해하기는 했지만, 이란은 차원이 달랐다. 8000만 인구, 세계 4위의 원유 매장량을 가진 이란은 미국의 안보를 실제로 위협할 능력을 지닌 강력한 적국으로 여겨졌다.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 급진파 학생들이 444일간 미국인 50여명을 인질로 붙잡고 미국대사관을 점거한 사건으로 양국 관계는 파국을 맞았다. 미국은 이라크를 부추겨 1981년부터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했다. 1988년 미 해군의 이지스 순양함 빈센스호는 호르무즈해협에서 이란 민항기를 미사일로 격추해 290명을 숨지게 했다.
2002년 이란 반체제 단체가 이란의 비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폭로하면서 핵 위기가 시작된 뒤, 미국은 이란을 압박하기 위한 모든 카드를 동원했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2002년 연두교서에서 이란,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미국의 동맹 이스라엘은 언제라도 이란 핵시설들에 대한 선제공격에 나설 준비가 돼 있다고 위협해 왔다. 미국은 이란 경제를 고사시키기 위해 유엔 안보리에서 경제제재를 통과시켜 국제사회가 이란과 경제 거래를 끊도록 했고, 이란의 생명줄인 석유 수출을 봉쇄했다. 해킹 프로그램인 스턱스넷으로 이란 핵 시설을 공격해 마비시키기도 했다.
압박으로는 끄떡 않던 핵 문제는 결국 외교로 풀렸다. 이란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는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 강화, 제재 해제로 얻을 경제적 이익 등을 두루 고려해 미국과 협상에 나서는 결단을 내렸고, 오바마 대통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란 핵 문제가 해결되자, 북핵 문제만 덩그러니 남았다. 협상 반대론자들은 북한과의 핵 협상은 안 된다며 많은 이유를 댄다. 이란과 달리 북한은 세 차례나 핵실험을 했고, 심각한 인권 문제를 가진 세습 독재 정권이며, 이미 미국과의 핵 협상을 여러차례 깼다…. 오바마 행정부가 동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추진하면서, 한반도 긴장을 중국 견제와 동아시아 미사일방어체제 구축, 미-일 동맹 강화에 활용하는 구도는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한다. 하지만 어떤 상황도 계속 악화하는 북핵 문제를 풀려는 대화마저 포기해야 할 변명은 될 수 없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란 핵 협상 타결 뒤 연설에서 “수십년간의 적대적 관계로는 이룰 수 없었던 포괄적 합의를 이뤄냈다”고 했다. 이제 그 말을 북한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할 때다.
박민희 국제부장 minggu@hani.co.kr
박민희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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