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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계의 창] 일본 정치문화의 변용 / 야마구치 지로

등록 2015-07-19 18:40

안보법제를 둘러싼 논의를 계기로 일본 정치문화의 분극화 현상이 분명해지고 있다. 하나의 흐름은 반지성주의, 또 다른 흐름은 민주화를 진전시키는 시민문화이다.

반지성주의는 내셔널리즘을 앞세운 운동이나 일부 언론뿐 아니라 정치의 세계에까지 스며들어 있다. 애초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관련된) 안보법제 자체가 반지성주의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헌법학자와 내각법제국 전직 장관들이 안보법제를 ‘위헌’이라 단언하고 있지만 정부는 이에 대해 제대로 반론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자위대는 자국 방어를 위해 무기 보유가 허용된다. 다른 나라를 방어하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헌법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회에서 진행된 법안 심의에서 아베 신조 총리나 나카타니 겐 방위상은 (의원들의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거나 논의를 얼버무리는 태도로 일관했다.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게 되면 자위대원이 위험한 상황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상대가 일본 국내에서 테러를 시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부는 자위대원의 위험이 커지지 않는다거나, 국민의 안전이 (오히려) 높아진다는 망상으로 보이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 정치 지도자가 논리나 객관적 사실 인식을 포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지성주의에 물들고 있다.

문화의 세계에선 반지성주의를 앞세운 작가나 정치가가 차별이나 편견을 부추기고 있다. 얼마 전 자민당의 문화예술간담회라는 모임에 강사로 초대된 햐쿠타 나오키라는 소설가는 중앙정부에 비판적인 오키나와의 지방지 두 개를 쓰러뜨리자고 말하고, 자민당 의원은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가해 방송 보도를 통제하자고 기세를 올렸다. 게다가 정치가나 보수 언론인들은 그런 발언까지 ‘언론의 자유’라며 정당화했다. 유언비어를 이용해 다른 사람을 멸시하거나 자유를 부정하는 논의가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태연히 통용되는 것이 현재의 일본이다. 그러한 풍조 아래서 한국에 대한 멸시를 부추기는 언설이 이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하게 생각하며 분노하고 있다.

반지성주의는 정당도 약화시키고 있다. 자민당은 예전과 같은 넓은 시야와 균형 감각을 잃어버렸다. 아베 총리가 실패했을 때 사태를 수습할 다음 지도자가 부재한 상황이다. 이것은 자민당에도, 일본에도 위기가 된다.

안보법제 반대 운동을 계기로 새로운 시민문화가 모습을 드러내며 확산되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2011년 후쿠시마 제1원전의 대사고를 계기로 탈원전을 요구하는 시민운동이 확산됐다. 이런 운동에 더해 학생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운동이 여론을 만들어내고 있다. 학생들은 라인(한국의 카카오톡)이나 메일 등을 통해 조직을 확대하며 수천, 수만명의 시민을 국회의사당 주변에 불러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런 학생들을 보고, 학자들도 침묵을 지키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며 안보법제에 반대하거나 전후 70주년 담화(아베 담화)에 침략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분명히 담을 것을 요구하는 등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게 됐다. 안보법제 강행 통과를 계기로 아베 내각에 대한 지지율이 40% 선이 깨지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동아시아에선 한국과 대만의 학생 운동으로부터 민주화 운동이 시작됐다. 일본은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구자라고 스스로 자리매김했지만, 일본 민주주의는 정당이나 의회 차원에 국한된 형식적인 것에 머물러 있었다. 1960년에는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추진한 미-일 안전보장 조약에 반대하는 대규모 항의운동이 벌어졌지만, 그 후 운동의 문화는 소멸했다. 일본 시민들이 중요한 정책에 대한 의견을 밝히기 위해 일상적으로 거리에 나와 목소리를 높이게 된 것은 2011년의 탈원전 운동 이후다. 오히려 일본이 한국 등의 민주화 운동의 뒤를 따라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상황이다.

야마구치 지로 일본 호세이대 법학과 교수
야마구치 지로 일본 호세이대 법학과 교수
전후 70년을 맞는 올여름, 일본의 민주정치는 커다란 분기점에 놓여 있다. 자기중심주의와 사고정지(思考停止) 아래 전후 민주주의가 쌓아 올린 평화와 안정을 부술 것인가, 새로운 시민문화가 민주주의를 성숙시킬 것인가. 8월에 전쟁과 평화를 생각하는 가운데, 일본 국민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길 기원한다.

야마구치 지로 일본 호세이대 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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