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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권혁웅의 오목렌즈] 병목과 스케치

등록 2015-08-16 18:21


권혁웅 시인
권혁웅 시인
이번 여름에도 휴가를 가지 못했다. 일이 많아서라고 둘러댔지만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못 갈 것도 없는 일정이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란 말도 있잖아? 모기떼에서 바가지요금까지 휴양지에는 좋은 거 빼고 다 있다고. 에어컨 밑에서 거풍(擧風)하는 양반들처럼 두 팔 벌리고 버티는 게 최고야. 아내가 눈을 흘겼다. 그게 다 방콕을 너무 사랑해서야. 하고많은 관광지 중에 왜 매번 거기냐고! 문득 톨게이트 앞에 부채꼴로 늘어선 차들의 긴 행렬이 떠올랐다. 요금을 내기 위해 횡으로 늘어선 차들은 종으로 좁아지는 도로 앞에서 북적댄다. 병목현상이다. 스승님 한 분은 말을 더듬을 때마다 “이거 언어의 병목현상이야”라고 말씀하셨다. 그대를 앞에 두고 나는 할 말이 너무 많아. 내 말이 자동차는 아니지만 앞다퉈 그대를 찾아가려고 하네. 혹은 줄줄이 늘어선 타이어들의 흔적을 스케치선이라 불러도 좋겠다. 대상의 윤곽을 그릴 때에는 여러 번 거듭해서 선을 그린다. 단 하나의 윤곽을 잡기 위해서는 이렇게 저렇게 엇나가는 선이 있어야 한다. 그대 앞에서 내가 말을 더듬는 것도 이것 때문이야. 그대에게 건넬 단 하나의 말을 찾기 위해서 선 위에 선을 긋는 거지. 목적지가 ‘그대’인 휴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차들의 긴 행렬도, 그 행렬이 만들어낸 병목구간도 모두 그대에게 이르기 위한 코스일 텐데. 다음에는 에어컨 밑에서 항복하는 병사들 흉내를 내지 말고, 어서어서 그대를 따라가야겠다.

권혁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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