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중순에서 하순으로 넘어가는 이 무렵은 문학 계간지 가을호들이 발간되는 때다. 2015년 가을호 계간 문예지들에는 유난히 관심이 쏠리는데, 지난 두달 사이 문단 안팎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른바 ‘신경숙 사태’를 어떤 식으로든 다룰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창비 편집인 백낙청 선생은 지난 9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창작과비평> 가을호가 머리말과 몇몇 ‘자료’를 통해 창비 쪽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창비와 함께 ‘문학권력’으로 지목된 문학동네와 문학과지성사의 반응도 궁금하다.
표절과 문학권력을 중심으로 진행된 논의에서 몇몇 출판사와 함께 작가들과 비평가들에게도 질타가 쏟아졌다. 적잖은 작가가 ‘표절 법정’에 소환되어 크고 작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상당수 평론가는 문학권력을 행사하고 출판상업주의에 복무한 혐의를 써야 했다. 논의는 주로 문단 인사들이 이끌었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 등을 통해 문단 바깥으로도 퍼져 나갔다. 언론은 유례없는 열정으로 사실과 흐름을 좇고 이슈를 제기했다. 나 역시 그 일부였다.
윤지관 교수는 한국작가회의 게시판에 쓴 글에서 신경숙 표절 사태에 대한 문단 안팎의 반응이 ‘여론재판’과 ‘광풍’으로 치달았다면서 그에 “언론이 엄청난 기여를 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사태 발생 이후 한달 남짓 언론이 경쟁적으로 쏟아낸 보도와 논평에는 과도하거나 부적절한 내용이 없지 않았다. 지난 과실을 새삼 헤집거나 근거 없는 혐의를 씌워 작가들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나를 포함해 문학 저널리즘에 종사하는 이들이 반성하고 성찰할 대목이라 본다.
언론이 다른 각도에서 반성할 일도 있다. 신경숙 사태와 관련한 보도와 토론회 등을 두고 ‘15년 전과 같은 가수들이 똑같은 레퍼토리로 부르는 노래’ 운운하는 반응이 있었다. 2000년을 앞뒤로 불거졌던 주례사비평과 문학권력 논쟁을 두고 하는 말들이었다. 말인즉 그르지 않되, 인과관계가 뒤집힌 경우라 해야겠다. 15년 전과 같은 인물들이 다시 나와 그때 했던 주장을 되풀이하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당시 문제삼았던 것들이 아직껏 해결되지 않은 채 여전히 또는 더 심각하게 폐단으로 작용하기 때문 아닐까. 차이가 있다면 15년 전에는 언론이 거의 무시하고 침묵했던 반면 2015년 여름에는 언론이 그들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
언론의 더 심각한 반성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문학권력과 출판상업주의에 대한 비판을 쏟아낸 언론은 과연 그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언론 스스로가 문학권력으로 행세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권력의 암묵적 조력자 노릇을 한 적은 없었던가. ‘권력’과 ‘상업’의 눈치를 보느라 언론 본연의 비판 기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던가….
이것은 사실 동료 기자들을 향하기 전에 나 자신에게 엄중히 따져 물어야 할 질문들이다. 문학담당 기자라는 중책을 맡아 일한 지 어언 23년. 새로 문학을 맡게 되었다는 ‘신고’를, 지금 읽어 보면 낯이 뜨거워질 정도로 거칠고 서투른 비판 기사로 갈음한 데서부터 시작해 적어도 초중기에는 취재와 보도에서 비판적인 자세를 놓치지 않으려 나름 노력했다. 그러느라 소중한 취재원인 작가 및 출판인 들과 척을 지기도 여러번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턴가 비판보다는 공감과 칭찬이 편하고 익숙해졌다. 취재원들과의 관계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연륜에 따른 성숙이라며 스스로를 속이려 했다. 독이 든 사과였다.
2015년 여름의 문단 스캔들은 나 같은 문학기자가 본분을 다하지 못하면서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터진 것이라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귀중한 지면을 이처럼 부끄러운 반성문으로 채우는 소이이다.
최재봉 문화부 선임기자 bong@hani.co.kr
최재봉 문화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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