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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몸의 일기

등록 2015-08-28 19:36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
<몸의 일기>에는 개인의 몸과 세계가 물감처럼 퍼져 액상(液狀)을 이루고 있다. 읽는 사람은 그 과정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가슴 아프고 신비롭다. 내 생애를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작가의 감수성과 뛰어난 표현력, 그리고 몸의 생애가 주는 감동 때문일 것이다. 한편 나는 흥분했다. 이 책은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전복한다. 고전을 교체할 시기가 왔다!

‘나의 일기’가 아니라 ‘몸의 일기’일까. 성폭력 추방운동 구호 중에 “내 몸은 나의 것이다”는 표현이 있다. 맞는 말 같아 보이지만, 정확하게는 “내 몸은 나다”라고 해야 한다. “내 몸은 나의 것”일 때는 이미 나와 몸이 분리된 상태다. 내가 내 몸을 소유하고 있다는 여전한 몸과 마음의 이분법이다. 몸 위에 이성(머리)이 있어서 머리가 몸을 통제한다는 것.

이 책이 나의 일기가 아니라 몸의 일기인 이유다. 몸(이성, 영혼, 신체, 감정, 생각…)이, 나다.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나크는 12살(1936년)부터 88살(2010년)까지 몸의 일기를 썼다. 이 책은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시, 일기, 에세이, 역사서, 이론서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

몸은 현대 사상의 첨단 이슈다. 몸에 대한 인간의 인식 변화, 몸 자체의 신체적 작용, 몸과 사회의 관계가 모두 몸으로 증거되면서 몸은 살아 있는 앎의 보고가 되었다. 몸 자체가 인식자이며, 사회가 몸에 어떤 권력을 행사하고 인간은 어떻게 대응하는지, 신체는 환경과 더불어 어떻게 자연을 변화시키는지.

우리는 모두 각자 다른 몸들이다. 같은 성별이라도 ‘장애인’으로 분류되어도 같은 몸은 없다. 몸의 다름이 정치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말,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는 대로 살자”는 최악의 구호다. 인간은 평생 자기 생각에 다다르지 못한다. 생각은 몸의 배신자. 늘 타인의 시선과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머리(희망 사항)만 ‘앞서’간다. 오히려, 사는 대로 생각해야 한다. 모든 망상, 이데올로기, 거대 관념이 무너질 것이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아니라 삶 자체를 사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몸이 안 움직이는 사람”은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그토록 자주 인용되고 고전으로 상찬되는 이유는 근대 이행기에 인간이 고안한 ‘유일한’ 삶의 양식, 국가의 설계도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관념으로서 상상의 공동체인 국가를 상세히 묘사하면서 실체로 만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데 몸만한 비유가 어디 있으랴. <리바이어던>은 처음부터 끝까지 몸 이야기다.

사회 조직은 몸에 비유될 때(政體), 즉 물리적 실재라는 가정에서만 통치가 가능하다. 유기체는 하나의 생물, 한 개의 단위이다. 생물 하나가 단독자로서 전체다. 그래서 전체주의와 개인주의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사고다. 전자는 전체가 한 몸이고, 후자는 개인이 한 몸이다. 당연히 개인의 인권으로는 국가주의를 이길 수 없다. 작은 개인과 큰 개인 중 누가 희생해야 하겠는가. 국가가 한목숨인데 어떻게 타인·이견·차이가 인정되겠는가. ‘국가안보, 적, 간첩, 국론 분열’이 언제나 통하는 이유다.

<몸의 일기>는 구구절절(句句節節)하다. 한 권의 책이라기보다 한 줄의 인생. 개미가 성(城)을 공략한다. 가장 급진적인 개미는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다. ‘이등 시민’이 몸의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 문명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사회가 이들이 말하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이유다. 저자는 여성의 일기가 몹시 궁금하다고 했지만, 여성의 일기는 “엄마 뱃속에서 죽었어요”(여아 낙태)로 시작될 것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몸이 역사다. 역사는 흘러온 것이 아니다. 문제제기 될 뿐이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침략에서 돌아올 때 사랑하는 조제핀에게 편지를 보낸다. “곧 도착할 테니 씻지 말고 기다리시오.”(31쪽) 냄새를 제칠 만큼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원래 후각은 근대에 와서 가장 억압당한 감각이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목욕, 위생, 소독이 대중화되기 전이었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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