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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빠던’ 세리머니는 삼류다 / 이춘재

등록 2015-09-16 18:42수정 2015-09-18 14:52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의 명문 댈러스 카우보이스에서 29년 동안 지휘봉을 잡았던 톰 랜드리(1924~2000) 코치는 엔에프엘의 ‘전설’이다. 그의 20시즌(1966~1985) 연속 '위닝 시즌'(승률이 5할이 넘는 시즌)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를 명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건 지도 철학이다. 댈러스가 슈퍼볼에 진출했을 때의 일이다. 팀이 지고 있을 때 한 선수가 극적으로 터치다운을 성공시켰다. 그는 역전의 기쁨에 취해 엔드존에서 엉덩이춤을 마구 추어댔고, 벤치로 달려가 동료들과 요란하게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슈퍼볼 우승을 코앞에 두게 됐으니 흥분하는 건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랜드리 코치는 그에게 다가가 뒷목이 서늘해질 정도로 차갑게 말했다. “이봐, (터치다운하기) 전에 하던 대로 행동하라구(Act like you’ve been there before).” 역전을 당해 ‘멘붕’이 된 상대 선수들 앞에서 오버하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랜드리 코치의 말은 엔에프엘 감독들이 스포츠맨십을 강조할 때 자주 쓰는 명언이 됐다. 스포츠맨십에서 가장 강조되는 덕목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다. 상대를 이기면 기고만장해지고, 지면 분한 마음이 드는 건 인지상정이다. 극적인 순간에 승패를 결정짓는 활약을 하게 되면, 비록 행운에 따른 것일지라도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희열을 느끼기 마련이다. 스포츠맨십은 이런 자연스런 감정들을 자제하라고 가르친다.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라는 것이다. 상대도 그날의 경기를 위해 혹독한 훈련을 견뎌냈고, 정정당당한 승부를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가 최근 한국 프로야구 홈런 타자들의 ‘빠던’ 세리머니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빠던은 ‘빠따(배트) 던지기’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신문은 롯데 자이언츠의 황재균이 동점 홈런을 친 뒤 방망이를 하늘 높이 던지는 모습을 담은 유튜브 동영상을 소개하면서 “한국에서는 그냥 방망이 던지기일 뿐이지만, 미국에서는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된다”고 꼬집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저렇게 하면 다음 타석에서 (투수의 보복 행위로) 목으로 공이 날아올 게 확실하다”는 한 메이저리거의 촌평도 소개했다.

메이저리거들이 방망이 세리머니를 자제하는 건 스포츠맨십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팬들도 마찬가지다. <유에스에이 투데이>가 지난해 7월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337명 참가)에서 야구팬 60%가 ‘방망이 던지기 세리머니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당시 밀워키 브루어스의 카를로스 고메스가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에이스 게릿 콜한테서 홈런을 뽑아낸 뒤 방망이 세리머니를 한 게 큰 이슈가 됐다. 고메스의 세리머니는 황재균에 비하면 애교로 봐줄 만했지만, 두 팀은 벤치 클리어링까지 갈 정도로 격렬하게 충돌했다. <유에스에이 투데이>는 “메이저리거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그윽한 멋이 미국프로야구에 있다고 자부한다. 그 멋은 상대를 존중하는 신사의 게임이라는 것이다”라고 썼다.

이춘재 스포츠부장
이춘재 스포츠부장
홈런은 온전히 타자의 기량만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상대 투수가 홈런을 치기 좋은 속도와 코스로 공을 던지지 않는다면 담장을 넘기기 어렵다. 투수의 ‘실투’라는 행운이 뒤따라야 한다는 얘기다. 프로선수쯤 되면 이를 모를 리 없는데도 리틀야구장에서나 볼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건 볼썽사납다. 방망이를 던지기 전에 자신이 그 순간 마운드에 서 있다고 가정해보라. 가뜩이나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점점 희박해지는 것 같은 세상이다. 팬들은 그런 세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 야구장을 찾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이춘재 스포츠부장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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