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 외교관 사이에서 전해지는 격언이 있다. “러시아는 보기보다 강하지 않지만, 보기보다 약하지도 않다.”
유럽을 제패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는 러시아 땅에서 얼어죽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동양의 신흥국 일본에 패하며 제국 붕괴의 길로 갔다. 러시아를 승계한 소련은 2차대전에서 승승장구하던 히틀러의 나치 군을 스탈린그라드에서 붕괴시켰다. 그리고 초강대국으로 떠올랐다. 세계 최강이라던 소련 지상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빈약한 장비의 이슬람 전사 무자헤딘들에게 혼쭐이 나서 패퇴한 뒤 붕괴의 길로 갔다.
제국시대 이래 러시아가 보여준 강력함과 허약함, 혹은 외유내강과 허장성세는 이 나라가 가진 역사적 배경과 지정학적 지위의 산물이다. 고대 이래 중앙아시아의 수많은 유목 기마민족들의 발굽 아래서 탄생한 러시아는 지정학적인 안보 취약과 이에 대한 불안감을 탄생 이래로 지녀왔다. 동서 양쪽으로 탁 트여 경계가 없는 평원은 고대에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 근대 이후에는 나폴레옹 군대와 히틀러 군대 등 서유럽 강대국들의 침략 통로가 됐다. 러시아가 탄생 이래 끝없이 영토 팽창을 추구하는 근본 배경은 안보다. 러시아는 확장된 영토 자체를 안보 장벽으로 삼았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러시아와 소련의 광대한 영토에 패한 것이다.
근현대의 지정학은 17세기 이후 강대국으로 모습을 드러낸 러시아의 출현으로 시작된다. 유럽에게 러시아는 고대 이래 아시아에서 침략해 오던 스키타이, 훈, 마자르, 몽골, 튀르크 등 유목 기마민족들의 지위를 대체하는 세력이었다. 러시아의 출현으로 아시아 기마민족 세력들의 침략은 종언을 고했으나, 이젠 끝없이 영토를 추구하는 러시아가 유럽을 압박하는 존재가 됐다.
근현대 지정학의 아버지인 핼퍼드 매킨더는 러시아가 장악한 중앙아시아 지역을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을 결정할 심장부라고 규정했다. 인구와 경제력이 집중되어 있는 유라시아 대륙의 중요 연안지역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영국으로 대표되는 해양세력은 바다를 통해서 이 중요 연안지역에 접근해 장악하고 있었으나,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 중앙부를 관통하는 대륙철도 등을 통해 이 연안지역에 더 손쉽게 접근하며 영국의 패권을 위협하고 있다는 논리였다.
영국과 러시아의 마지막 제국주의 패권 다툼인 그레이트 게임은 매킨더의 이런 논리를 배경으로 한다. 영국은 흑해에서 극동까지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고 크림전쟁·아프간전쟁·러일전쟁을 벌이거나 후원해 결국 러시아를 막았다. 냉전시대 미국의 대소련 봉쇄 정책도 같은 맥락이다.
러시아가 제국 이래 대외 진출에서 가장 역점을 뒀던 지역은 흑해 이남이었고, 이후 중동으로까지 나아가려 했다. 크림전쟁과 양차 대전, 냉전을 거치며 러시아와 소련은 흑해 이남으로 영토를 더 확장했고, 중동에 세력을 심으려 했다. 이런 노력은 영미의 봉쇄와 반발로 실패로 귀결됐다. 소련 붕괴로 이어진 아프간전쟁은 이런 맥락의 일환이다.
러시아가 30일 시작한 시리아 공습은 역사적 사건이다. 제국 이래 중동에서의 첫 직접적인 군사행동이었다. 타르투스라는 지중해 연안의 군항도 확보했다. 소련 전성기 때도 이런 전략적 거점은 확보하지 못했다. 유가 하락과 서방의 경제제재로 허덕이는 러시아에게 시리아 내전 개입은 제2의 아프간전쟁이 될 수도 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러시아가 오랜 숙원인 중동 진출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지금의 러시아는 분명 과거의 소련은 아니다. 하지만 세계라는 체스판에서 졸이 아님도 분명하다. 러시아는 강해 보였지만 약했고, 약해 보였지만 강했다. 중동 체스판은 더 복잡해졌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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