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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재봉의 문학으로] 표절에 관한 이해와 오해

등록 2015-10-08 18:41

안정효의 중편소설 ‘낭만파 남편의 편지’와 밀란 쿤데라의 짧은 장편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두 소설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권태기에 들어선 부부(커플)가 있다. 남편(동거남)이 아내(동거녀)에 대한 ‘깜짝 선물’로 발신인을 익명으로 처리한 사랑 고백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가 남편(동거남)이 아닌 다른 남자한테서 온 것이라 생각한 여자는 혼자만의 장소에 편지를 감춰 두고 내색을 하지 않는다. 의혹을 품은 남자가 두번째 편지를 보내지만 여자의 반응은 마찬가지. 몇차례 비슷한 편지가 이어지면서 여자(의 불륜 의도)를 의심하게 된 남자가 결정적인 유혹의 편지를 보내고, 두 사람 다 파국이 기다리는 약속 장소로 향한다….

두 작품이 이렇게까지 동일한 이야기 구조를 지녔다면 한쪽의 표절 가능성을 생각해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리고 표절 혐의는 대체로 한국 작가 쪽에 돌아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안정효 소설이 1993년에 발표되었고 쿤데라 책이 프랑스에서 1997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표절했다면 쿤데라 쪽일 텐데, 가능성이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인다. 안정효 소설은 프랑스어나 영어 등 외국어로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정효와 쿤데라가 아무런 사전 교감 없이 거의 비슷한 상상력을 소설로 옮겼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테다.

이 사례가 알려주는 것은 문학적 영감과 상상력의 세계가 생각보다 오묘하고 난해하다는 사실이다. 이역만리 떨어진 두 작가가 똑같은 발상을 소설로 쓰는 일이 문학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지난여름 표절을 둘러싼 뜨거운 논란을 겪으면서 안정효와 쿤데라의 경우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신경숙 표절을 계기로 언론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새롭거나 낡은 표절 사례 또는 혐의들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개중에는 타당하고 유효한 지적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비슷하면 표절’이라는 등식은 가장 흔하면서도 심각한 오해인데, 안정효와 쿤데라의 사례에서 보듯 사정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표절과 차용 또는 영향 사이의 미묘한 차이에 대한 이해와 배려도 부족했다. 폴 엘뤼아르의 ‘자유’와 김지하 시 ‘타는 목마름으로’ 및 김남주 시 ‘조국은 하나다’, <맹자> ‘진심장’에서 군자의 세가지 즐거움 중 하나로 꼽은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과 윤동주 ‘서시’의 관계를 단지 표절로 정리하고 넘어가면 그만인가.

소설 작품의 경우 다른 소설의 문장이나 구성을 따오는 것과 소설이 아닌 다른 장르 예술 또는 비문학적 콘텐츠의 문장 또는 취지를 가져오는 것에 대해서도 섬세한 구분이 필요하다. 인용 출처를 밝히지 않은 작가의 단순 실수에 표절 딱지를 붙이는 일은 별로 생산적이지 않다. 오늘날 작가를 둘러싼 온갖 문자적·비문자적 환경이 창작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는 것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일이라고 보아야 한다. 작가의 부주의하거나 부도덕한 행위는 지적하고 비판해야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프랑스 역사학자 장자크 피슈테르가 쓴 소설 <편집된 죽음>에서 주인공은 소년 시절부터의 친구를 향한 피해의식과 복수심, 열등감 때문에 친구의 공쿠르상 수상 소설을 표절로 몰아가 결국 그를 파멸시킨다. 문학평론가 장은수는 “표절이란 한 작가의 영혼을 예리한 칼로 긋는 행위”라고 했는데, 그 말은 오히려 표절 혐의 제기가 지닌 파괴력에 더 어울리는 표현이라 하겠다. 여름 더위만큼이나 뜨거웠던 표절 논란을 뒤로하고, 이제 가을바람처럼 차분하고 진지한 논의를 기다린다.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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