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늦은 얘기지만 벨라루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은 썩 이채롭다. 그가 시나 소설 또는 희곡 같은 문학의 주류 장르에서 활동하는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알렉시예비치는 논픽션 작가다. 2차대전 참전 여성들,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피해자들, 소련 사회주의 몰락에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시도한 이들…. 커다란 역사적 사건에 관여했거나 그로부터 심신의 상처를 입은 이들을 인터뷰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부각시키는 것이 알렉시예비치의 작업이다. 그 자신은 ‘목소리 소설’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의 글쓰기를 포괄하는 좀 더 일반적인 명칭은 ‘르포문학’일 것이다.
알렉시예비치의 노벨상 수상이 한국 문학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단행본 <민중을 기록하라-작가들이 발로 쓴 한국 현대사>와 인천작가회의 기관지 <작가들> 가을호 특집 ‘르포문학-한중일 르포 작가들과의 대화’에서 답을 찾아보자. <민중을 기록하라>는 전태일 분신 직후 그의 장례식과 평화시장 등을 취재한 소설가 박태순의 글 ‘소신(燒身)의 경고’에서부터 2009년 용산 참사를 다룬 시인 윤예영의 글 ‘용산으로 이어진 길, 가깝고도 먼’까지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다룬 작가들의 르포 스무 편을 엮은 책이다.
“어제 사람이 죽은 어둠 속으로, 구조된 광부는 오늘 다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 지하수를 건드려서 물통 사고가 터질 때에는 익사하는 게 아니라 무너진 돌무더기와 갱목, 차에 짓이겨 깨어지면서 이리저리 부딪쳐서 갱구로 밀려 나온다. 가스 사고 때에는 광차(鑛車) 레일이 엿가락처럼 돌돌 말려서 튀어나올 정도이고, 갱목은 순식간에 숯이 되며 차는 파편이 되는데 사람은 타서 뼈의 잔해나 찾을 수 있을 정도라 한다.”
1973년 강원도 정선군 사북 탄광에서 가스 폭발 사고로 17명이 숨진 뒤 현장을 찾은 소설가 황석영이 <한국문학> 1974년 2월호에 발표한 르포 ‘벽지(僻地)의 하늘’ 한 대목이다. 사실의 힘만으로 육박하는 인식의 충격이 먹먹하다.
<민중을 기록하라>에는 박태순·황석영은 물론 김남일·공지영·이원규·송경동 등 내로라하는 시인·소설가들이 필자로 참여했다. 그런데 세월호 유가족 르포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주도한 르포 작가 김순천은 르포를 대하는 문단 일반의 태도에 비판적이다. <작가들>에 실린 인터뷰에서 그는 기성 문단의 작가들이 “개인 작업에 매몰되어 있었고 좀 더 수준 높은 문학이라는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문단의 기성 시스템에 대해서 이미 다 포기를 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생각을 <민중을 기록하라>에 붙인 문학평론가 장성규의 해설에서도 만날 수 있다.
“우리가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는 문학이란 결국 소수 엘리트층에 의해 구성된 ‘그들만의 리그’일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픽션’만이 서사문학을 구성하는 것으로 재단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르포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고유의 미적 속성을 귀납적인 방식으로 추출하고, 이로부터 르포‘문학’에 대한 재인식을 시도하는 연구자의 자의식이다.”
국정원 선거 개입과 세월호 참사 책임을 뭉개고 시대착오적인 국정교과서 부활과 노동관계법 개악을 밀어붙이는 정권, 그름이 바름으로 둔갑하고 불의가 정의를 모욕하며 문학의 근간인 말이 훼손당하는 시절에 문학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지금이 80년대 못지않은 위기와 절망의 시대라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현실의 문제를 핍진하게 형상화하며” “문학의 공공성을 복원하”(장성규)기 위해 문학과 문학인들은 르포에서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민중을 기록하라!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bong@hani.co.kr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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