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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한류의 적은 내부에 있다 / 김기평

등록 2015-11-30 18:56

중국과 수교 직전이던 1992년 업무 관계로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중국인 가이드에게서 “한국인은 능가선무(能歌善舞, 노래를 잘하고 춤을 잘 춘다)의 민족”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땐 덕담 정도로 여기고 흘려들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한류’의 도래를 예견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얼마 전 경남 창원에서 ‘케이팝(K-POP) 월드 페스티벌’이 열렸다. 67개 나라 84개 지역에서 1만2천여명이 도전해 최종 열네 팀이 무대에 섰다. 상을 받은 영국 여성은 “케이팝 가수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대상을 수상한 나이지리아 팀은 전날 자신들의 ‘우상’인 국내 아이돌 그룹의 공연을 보면서 감격에 겨워 일부는 눈물까지 흘렸다. 이런 모습은 해마다 미국에서 열리는 케이팝 관련 행사들에서도 볼 수 있다.

반면 한류를 만들어내는 한국인의 자화상은 참담하기만 하다. 자살률 등 세계 상위를 다투는 우울한 통계 수치들을 열거할 필요도 없다. 열심히 살지만 대부분 행복하지도 않고 희망도 없는 삶에 좌절한다. 외국인들에게 ‘신선하고 전문적이며 발전적’으로 비치는 한류를 창출했다는 사실이 미스터리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한류는 모순 속에서 성장했다. ‘빨리빨리’ 문화가 경쟁력으로 탈바꿈한 반면 ‘대충대충’ 문화는 더는 허용되지 않고 있다. 그럴수록 사회적인 스트레스는 커졌다. 한국의 양념치킨은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이는 자영업의 대명사인 ‘치킨집’ 10곳 중 7~8곳의 ‘장렬한 희생’ 위에서 이뤄졌다. 한류를 낳은 우리 내부의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에는 적어도 그런 양면성이 있었다.

문제는 이제 그 모순의 양면성조차 ‘대칭적 균형’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동성’과 함께 한국 사회를 지탱해줄 ‘경제적 삶’이 불안해진 것이다. 미래는커녕 현실의 삶을 꾸려가기도 힘든 비정규직, 특히 간접고용(총 노동자의 약 20%) 등의 폐해는 우리 사회의 ‘비정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케이티엑스(KTX) 여승무원들이 7년간의 해고 무효 소송 끝에 지난 27일 서울고법 파기환송심에서 패소했다. 이들은 ‘2년 넘게 고용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한’ 현행법을 피하고자 한 한국철도공사(코레일)에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다 해고됐다. 1심과 2심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지만 대법원은 올해 2월 ‘직접 근로관계나 파견계약 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때 “땅 위의 스튜어디스”라는 수사가 붙던 이들이 겪어온 참담한 현실은 화려한 스타 시스템 이면의 한류 내부를 은유하는 게 아닐까.

참담한 노동환경으로 1842년 당시 영국 맨체스터 노동자의 차후 기대 수명치는 17년, 반면 농부는 38년이었지만, 이후 노동운동(차티스트운동) 등에 힘입어 상황이 크게 개선됐다. 미국 연방정부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시장독점 상황’을 막기 위해 소송을 냈고, 이런 시장독점을 막으려는 노력 속에 페이스북 등 글로벌 회사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2012년 대선 공약인 ‘경제민주화’가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었지만, 재벌 등의 이익과 상충하면서 현 정부에서 사실상 물 건너갔다.

김기평 고급 한국어 연구소 대표
김기평 고급 한국어 연구소 대표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 99도에서 1도만 모자라도 끓지 않는다. 문화는 물과 같고, 성패를 가르는 임계치는 그 1도에 달려 있다. 지금 한류가 ‘잘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한국 사회의 약자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개선되지 않는 한, 한류 내부의 약탈적 행태가 개선되지 않는 한, 이는 한때의 신기루로 전락할 수도 있다. 한류의 미래는 우리 내부에 있다.

김기평 고급 한국어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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