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다. 그것도 몹시 춥다. 날씨 얘기가 아니다.
인력 감축의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업종 불문이다. 조선·해운·항공·중공업·건설·금융에 이어 잘나간다는 전자와 자동차까지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고 있다. 어려워서 내보냈고, 곧 어려워질 것 같아 내보내고 있다고 한다.
나이도 가리지 않는다. 그동안 희망퇴직 하면 40~50대 부장이나 차장이 대상이었는데, 어느새 과장과 대리로 슬며시 내려오더니 지금은 신입사원까지 감원의 칼날 위에 서게 됐다.
임원도 마찬가지다. 주요 그룹들 대부분이 올해 정기 임원 인사를 마쳤는데, 승진은 대폭 줄어든 반면 옷을 벗은 임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많다.
이처럼 곳곳이 엄동설한인데, 단 한 곳 무풍지대가 있다. 바로 재벌 3, 4세들이다. 주요 그룹들의 이번 임원 인사를 보면, 재벌 3, 4세들의 초고속 승진이 유난히 많다. 주로 30대들인데 상무, 전무를 넘어 부사장까지 올랐다. 현대중공업 최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남 정기선(33) 상무는 전무로 승진했다. 현대중공업 사상 최연소 전무라고 한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장남 김동관(32) 한화큐셀 상무도 전무로 승진했다. 상무 승진 1년 만에 또 승진이다. 허창수 지에스(GS)그룹 회장의 장남 허윤홍(36) 상무는 지에스건설 전무로, 허영인 에스피씨(SPC)그룹 회장의 장남 허진수(38) 전무는 파리크라상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의 장남 이규호(31) 코오롱인더스트리 부장은 입사 3년 만에 상무보가 됐다. 박문덕 하이트진로 회장의 장남 박태영(39) 전무는 부사장으로 승진했고, 임성우 보해양조 회장의 장녀 임지선(30) 상무는 대표이사 부사장이 됐다. 대표적 사례들만 뽑아본 것이다.
올해 재벌 3, 4세들의 약진(?)은 지난해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영향이 크다. 당시 재벌 자녀들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인사를 미뤘고 이번에 몰린 것이다.
이들 그룹은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승진 배경에 대해 해외에서 배운 글로벌 경영 지식과 젊은 감각으로 그룹의 변화를 추진하고 미래 성장 사업을 발굴·육성하는 책임을 맡기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하지만 재벌 3, 4세들의 이력을 보면 변화의 기운을 느끼기 어렵다. 대부분 해외 유학을 마치고 20대 중·후반에 입사해 30대 초반에 임원이 됐다. 천편일률적이다. 기업분석 사이트인 ‘시이오(CEO) 스코어’가 30대 그룹의 3, 4세 자녀 4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평균 28살에 입사해 31.5살에 임원 자리에 올랐다. 3년 6개월 근무하고 임원이 된다. 대졸 신입사원이 대리까지 평균 4년 걸리는데 이보다 6개월 빠르다.
이들 그룹은 또 경영을 승계하기 위한 일종의 수업이라고 설명한다. ‘왜 3, 4세는 경영권을 무조건 물려받느냐’라는 근본적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문제는 많다. 무엇보다 임원은 경영을 하는 자리이지 수업을 받는 자리가 아니다. 현장에서 기초부터 제대로 배우지 않은 채 중책을 맡으니 땅콩 회항 같은 대형 사고들이 터진다. 재벌 3, 4세는 2세와도 또 다르다. 2세는 창업자인 아버지의 실패와 성공을 옆에서 보면서 고락도 함께 했다. 하지만 3, 4세는 아예 그런 경험이 없다. 이들이 임원 자리에서 잘못된 결정을 할 때 제동을 걸기도 힘들다. 머지않아 오너의 위치에 오를 텐데 누가 나서서 쓴소리를 하겠는가.
같은 또래의 젊은 직장인들이 이런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금수저’와 ‘헬조선’ 같은 말들이 우리 사회의 유행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안재승 경제 에디터 jsahn@hani.co.kr
안재승 경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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