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희가 돌아왔다. 번역가가 아닌 소설가로. 새로 나온 <하루나기>는 그가 소설로는 24년 만에 낸 책이다.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이듬해 등단작을 표제작 삼은 소설집 <이상의 날개>를, 1991년에 장편 <섬에는 옹달샘>을 낸 그는 1998년 마지막 중편소설을 발표한 뒤로 소설에서 손을 떼었다. 대신 번역에 매진해 지금까지 300권 안팎 번역서를 냈다.
번역가 김석희의 출발은 소설가 김석희와 거의 동시였다. 그가 자신의 첫 번역책으로 꼽는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 소설 <화산도>가 책으로 나온 것 역시 1988년이었다. 소설과 번역을 양손의 떡처럼 쥐게 된 형국이었는데 생각만큼 행복하거나 순조롭지는 않았다. 소설은 학창 시절 이후 첫정이었으나 생활이 되지 못했다. 번역은 생계에 보탬이 되었지만 짜릿한 성취감은 소설만 못했다. ‘번역은 조강지처요 소설은 애인 같은’ 세월이 한동안 이어졌다.
1990년대에 써서 발표했으나 책으로 엮지는 않았던 중단편 중 아홉과 등단작을 한데 묶은 새 책 <하루나기>의 말미에 김석희는 ‘다시 시작하면서’라는 후기를 붙였다. 무얼 다시 시작한다는 말일까. 물론 소설 얘기다. 애인을 포기하고 조강지처에게 충실했던 그가 다시 애인을 챙기겠노라는 선언이 바로 <하루나기>인 것이다.
“번역 중인 작품은 미국의 여류작가가 쓴 대중소설. 출세한 남편에게 버림받은 세 명의 조강지처가 작당하여, 젊고 늘씬한 금발 미녀한테 새장가를 든 전남편들을 한 사람씩 파멸시키는 내용이다. (…) 소설은 150매가량 썼는데, 앞으로 100매쯤 더 쓰고 마무리 지을 작정이다. 한때 지식욕에 불탔던 한 사내가 결국은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젊어서 읽었던 헌책들을 팔아 연명하는 처지로 몰리게 된 사연을 약간 희화적으로 묘사한 내용이다.”
<하루나기>에 수록된 단편 ‘시간의 늪’에는 소설 창작과 번역을 병행하던 90년대 김석희의 모습이 생생하다. 또 다른 수록작 ‘유리로 지은 집’은 “작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지만, 작품은 가물에 콩 나듯 건지는 형편이고, 번역으로 용돈이나 벌어쓰는” 처지로 그 무렵 자신을 묘사한다. <하루나기>후기에 따르면 그는 등단 뒤 10년 정도는 이름 뒤에 ‘소설가·번역가’로 자신을 소개했지만 그 뒤 10년은 ‘번역가·소설가’로 순서를 바꾸었고 다시 그 뒤에는 아예 ‘소설가’를 빼고 번역가로만 행세했다. 이 책의 표제작은 마흔 안팎 사내 네 사람의 하루 일과를 이어달리기 식으로 그리는데, 주인공들 이름과 그들이 등장하는 장의 제목에서는 소설에 대한 김석희의 그리움이 엿보인다. 김종인(약약한 자의 슬픔), 염승섭(지하철의 청개구리), 현진걸(술 권하는 세상), 채만석(천하태평), 이런 식이다.
“의식 속에서건 무의식 속에서건 나는 종종 그녀가 그리웠다. 그 감정이 매번 복받칠 정도로 간절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날 밤의 기억이 내 몸을 구석구석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길과 더불어 다가오면, 나는 때로는 느닷없는 욕정에 휩싸이기도 했고, 또 때로는 아득한 안타까움으로 몽롱해진 채 온밤을 꿈꾸듯 지새우기도 했다.”
‘시간의 늪’에서 주인공이 젊은 시절 정을 나누었던 여성에 대한 열망을 그린 대목이다. 여기서 ‘그녀’ 자리에 ‘소설’을 놓으면 이것은 고스란히 소설이라는 애인에 대한 김석희의 감정 표출로 읽을 수 있다. “쓰고 싶은 소설이 서너개쯤 있다”며 “가을쯤 우선 경장편을 선보일 생각”이라고 제주의 그는 전화기 너머에서 말했다. 소설가 김석희의 새출발을 환영하고 응원한다.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bong@hani.co.kr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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