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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권혁웅의 오목렌즈] 참회록 쓰기

등록 2016-01-19 18:46


권혁웅 시인
권혁웅 시인
아기가 새로 개척한 곳이 몇 군데 생겼다. 첫 번째가 의자 숲이다. 옆에 넓은 통로를 놓아두고 식탁 아래 촘촘한 의자 사이로 기어가기를 좋아한다. 구절양장을 지나는 모험담이 펼쳐지는 곳이다. 두 번째가 마루에 고정해둔 흔들의자 위에 올라서기. 그네 겸용 요람인데 거기 누워 있을 나이는 지났다는 듯, 그 위에 올라서서 가로막대에 한 팔을 걸치고 비스듬히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이곳에선 호연지기를 배울 수 있다. 세 번째가 부엌의 오븐 앞이다. 오븐 덮개가 유리여서 이곳에 가면 얼굴이 비친다.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아기는 여기까지 기어와서 열심히 유리를 핥는다. 이거, 윤동주의 ‘참회록’ 아닌가.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처럼, 거기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아기는 밤이건 낮이건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려고 하는 모양이다. 손도 발도 아직 잘 쓸 수 없으니 내가 제일 잘하는 것, 입으로 닦아줘야겠다. 속으로 아기는 생각했겠지. 만 구개월 십일일을 나는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참회록’의 결말은 이렇다. 거울을 열심히 닦으면,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아기 버전도 비슷하다. 그러면 어느 오븐 아래서 홀로 청소를 하는 슬픈 엄마의 뒷모양이 나타나온다. 아기가 빠는 거울이 더러우면 안 되잖아.

권혁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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