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용 기자
아침햇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불구속 수사지휘 사건에 정치적 목숨을 건 것 같다. 18일 기자회견에서는 “정권의 심장부에서 나라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들고 있다”고 했고, 20일 상임운영위원회에서는 “친북 인사를 양성해 사회주의 체제로 이끌고자 하는 것이냐”고 ‘독기’를 뿜었다.
박 대표의 이런 결연함은 논리적 비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공공연히 부정하는 대학교수를 검찰이 법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하는데, 정부가 가로막고 나섰다”고 했다. 그러나 천 장관은 인권보호 차원에서 불구속을 지휘한 것이지, 사법처리를 반대한다고 하지 않았다. 유무죄는 사법부에서 가린다. 박 대표는 “청와대와 정부, 여당이 총출동을 해서 강정구 교수를 비호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고 했다. 여당은 “강 교수의 말에 절대 반대한다”고 여러차례 밝혔다. 왜 이런 ‘엇박자’가 나는 것일까? 혹시 박 대표가 사실 관계를 알면서도 일부러 왜곡했다면 국민들을 얕본 것이다. 국민들은 무식하지 않다.
박 대표가 다소 무리하게 ‘구국운동 몰이’에 나선 이유에 대해, 두 가지 분석이 있다. 첫째, ‘조건반사설’이다. 박 대표의 일생을 통해 체화된 그의 이념이 ‘빨갱이’를 풀어주는 것을 ‘양심상’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 ‘정치적 계산설’이다. 대선 예비후보 지지도 경쟁에서 이명박 서울시장에게 추월당한 처지에서 지금 승부수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좌우 대립을 증폭시켜 10·26 재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당 장악력을 높이기 위한, 의도적 행동이라는 분석이다.
두 가지 중 어느 쪽이든 박 대표는 지금 ‘정치적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 우선 조건반사적 ‘반공’은 시대정신이 아니다. 한나라당 안에서도 ‘구국운동’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다. 정치적 계산이라고 해도 너무 성급했다. 이번 사건에 대해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이 시장은 ‘상대적으로 합리적’이라는 인상을 공짜로 ‘획득’했다. 이 시장은 지금 속으로 웃고 있을 것 같다. ‘수구 골통’이라는 한나라당의 부정적 이미지를 박 대표가 꼭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국방부 장관 해임건의안 표결 사태를 겪으며 생긴 초조감에서 연정론을 무리하게 꺼냈다가 정치적 재앙을 맞았다. 승부는 함부로 거는 것이 아니다.
박 대표는 이번 일로 대선후보 대열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박 대표가 거둔 성과는 여당의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을 일시적으로 잠재운 것, 10·26 재선거 승리를 거듭 확인하는 것 정도다. 작은 것을 얻고, 큰 것을 잃게 된 것이다. 옛 여권의 이른바 ‘메인 스트림’에서는 한나라당 후보를 이명박 시장으로 세워서, 빼앗긴 정권을 되찾아와야 한다는 의견이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유권자들이 여성을 대통령으로 선택할 것인지 확신할 수 없고, ‘박정희의 딸’이라는 굴레를 벗기 어렵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명박 시장은 청계천에 이어 경부운하 건설을,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남북 평화공존을,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은 복지 강화를 자신들의 정치적 비전으로 쌓고 있다. 하지만 박 대표는 업적도 비전도 없다. 오히려 그 우아한 양장 속에 ‘교련복과 삼각대’를 감추고 있을 것 같다는 인상을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솔직한’ 대화를 나누던 유연함도, 호남을 방문해 보훈병원에서 부상자들을 위로하던 자상함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아쉬운 일이다.
성한용/정치부 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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