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예방적 방위전략> 윌리엄 페리, 애슈턴 카터 지음
박건영, 이성봉, 권영진 옮김
프레스 21, 2000
<예방적 방위전략> 윌리엄 페리, 애슈턴 카터 지음
박건영, 이성봉, 권영진 옮김
프레스 21, 2000
실존주의 심리치료로 널리 알려진 어빈 얄롬의 첫 번째 내담자는 편집증 환자였다. 그는 얄롬 박사가 FBI 요원이라고 우기면서 상담을 거부하였다. 얄롬은 할 수 없이 다음날 출생증명서, 운전면허증, 여권을 보여주었다. 환자는 자기 주장이 증명된 듯 기뻐했다. FBI와 관련된 자만이 그렇게 빨리 위조 증명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과 의심은 대상에 따라 다를 뿐 차이가 없다. 하나의 체계가 무한 확장되면 사람은 그 인식 안에서 돌고 돈다. 생애주의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막강한 논리가 있다. 일본 사회에서 천황제가 모든 합리성을 무너뜨렸다면 한국은 국가안보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적(북한)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 이런 의심을 멈추게 할 발상은 내가 아는 한, 없다. 경험도 경험이지만(한국전쟁), 이 문장은 “ ~ 할지도 모른다”로 끝나기 때문이다.
국가의 안전 보장 말고도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 “지갑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로또에 당첨될지도 모르다”…. 이는 모두 모를 일이다. 미래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미지의 가능성 때문에 확신하기 시작한다. 순환적 시간 개념에서는 미래가 예측 가능하지만, 직선적 시간 패러다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타인을 규정하는 방식, “나는 그들을 안다”,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다”가 겹쳐지면 폭력이 시작된다. “개성공단 자원이 핵무기 개발에 사용될 것이다. 쌀을 지원하면 군량미로 쓸 것이다” 이 논리는 모두 증거도 없고, 실제 사실무근으로 밝혀졌지만, 문제는 사실이라 할지라도 한 국가에서 국가 예산을 어떻게 쓰든 그것은 그들의 일이다. 정부의 수입과 지출을 시비 삼을 유일한 주체는 국민밖에 없다. 핵 문제를 반박하고 싶지만 이 지면으로는 모자라고, 일단 군량미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군인은 전쟁 상태가 아니면 굶어야 하는가? 전쟁을 반대하는 것과 사람인 군인을 반대하는 것은 다르다. 군량미는 나라 식량의 일부다.
“장정 열 명이 도둑 한 명을 못 막는다”는 말처럼 완벽한 안보는 불가능하다. 무엇인가를 보장한다는 발상은 파이(π)처럼 한없는 숫자, 근사(近似)값이다. 원둘레라는 길이(현재)의 단위를 어떻게 직선(미터 등)을 써서 구할 수 있겠는가(미래). 현실과 사유는 불일치하기 마련이다. 현실‘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 인간의 의지다. 의지가 무리를 낳을 때 재앙이 온다.
<예방적 방위전략>은 냉전 이후 이른바 ‘페리 구상’으로 유명한 책이다. 원래 부제는 ‘미국의 새로운 안보 전략’인데 번역판은 ‘페리 구상과 러시아, 중국 그리고 북한’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전세계적으로 국가안보 담론의 전환점이 되었는데, ‘개성공단 스트레스’ 이후 생각이 났다. 박 대통령이 이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1970년대 초 아버지 정권의 인식을 딸이 2015년에 미국식 세계 전략으로 실현했다.
이 책의 핵심은, 소련이 사라졌기 때문에 미국의 생존에 아무런 위협이 없어져 지배적인 군사력을 보유할 필요가 없지만, 역설적으로 이 두 가지 상태(무적이지만 최강 군사력을 갖춤)를 영구 보장 한다는 의미다(41쪽, 밑줄은 필자). 그것이 제목, 예방적 방위전략(Preventive Defense, 1999)이다. 국제정치에서 공격과 방어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다시 말해, 미국의 새로운 안보 전략의 핵심은, “미리 공격‘해둔다’(예방공격)”는 전지구적 지배다.
서두의 의사와 환자의 사례처럼 증명 노력은 소용없다. 모든 위험 가능성에 대비한다(158쪽)? 남한이나 미국이 이런 ‘걱정’을 하거나 북한이 그 걱정의 대상이 된다면, 한반도는 곳곳이 지뢰밭이 될 것이다. 상대를 믿자는 얘기가 아니다. 상대를 못 믿는 사람은 자신도 못 믿는다. 이런 사람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여기가 지옥이다. 헬 남한.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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