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길 국제뉴스팀 선임기자
이리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나고, 파출소 지나치려다 경찰서에 들어가고, 쓰레기차 피하다가 똥차에 치인다는 말이 있다. 미국이 지금 그 꼴이다.
5일 열린 공화당 대선 후보 위스콘신 경선에서 테드 크루즈가 낙승했다. 선두를 달리던 도널드 트럼프는 7월 전당대회 전까지 대의원 과반 확보가 불투명해졌다. 트럼프의 대선 후보 지명을 막으려는 공화당 주류들의 전략은 이제 성공 가시권에 들어왔다. 그런데 트럼프 대신 부상한 크루즈 역시 만만치 않다. 한마디로 ‘점잖은 트럼프’, ‘화장한 트럼프’이다. 트럼프처럼 막말만 하지 않는다. 정견에서 별 차이가 없다.
이민, 총기소유 규제, 성소수자 등 사회 소수집단 권익 보호, 최저임금 인상, 낙태, 의료보험 개혁을 반대한다. 기후변화 주장은 사기라며, 이에 대한 대처도 반대한다. 범죄 단속 강화를 주장하며, 사생활 보호 강화에 반대한다. 누진세율 대신 단일세율을 지지한다.
대외정책도 고립주의와 무력 개입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미국 대외정책의 최대 현안인 시리아 내전 문제를 보자. 크루즈는 시리아 내전에서 “이슬람국가를 완전히 파괴하고” “테러분자들을 융단폭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이라크에서 정권교체를 위한 미국의 개입 실패를 거론하며, 시리아 내전 개입에 반대한다. 그는 “만약 오바마, 클린턴, 루비오가 바샤르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타도에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급진적인 이슬람 테러세력들이 시리아를 접수할 것이고, 그런 시리아는 이슬람국가에 의해 장악될 것이고, 이는 실질적으로 미국 국가안보에 더 나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슬람국가에 대한 미국의 공습을 두고 “미군은 알카에다 공군으로 복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 공습이 이슬람국가와 경쟁하는 알카에다만 이롭게 한다는 논리다.
트럼프는 대선 출마 전에 시리아 내전의 이슬람국가 등 테러세력들을 폭탄으로 날려버리고 그 가족들까지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그가 대선 출마 뒤에는 다른 대선 후보 경쟁자들이 시리아에서 3차 대전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시리아 내전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개입을 칭찬하고, 바샤르 아사드 시리아 정권도 지지한다.
차이가 없는 건 아니다. 본질에서 같은 입장에서는 표현과 정도의 차이는 있다. 이번 대선에서 가장 큰 쟁점인 이민 문제에서 트럼프는 무슬림 입국 금지, 멕시코 국경 장벽 설치 등 극단적 제안을 한다. 크루즈는 미 정부의 불법 이민자 사면 반대 정도만 얘기하나, 이는 트럼프와의 차별성을 위한 립서비스일 뿐이다. 세금 문제에서 트럼프는 현행 누진세율을 점진적으로 바꿔 단일세율로 가자고 하는 반면, 크루즈는 국세청 폐지까지 주장한다.
본질적인 입장 차이가 있는 것도 있다. 자유무역을 놓고 트럼프는 반대, 크루즈는 찬성이다. 사회보장연금을 놓고 트럼프는 유지와 확대, 크루즈는 축소 쪽이다. 트럼프는 어쨌든 미국 중하류층들의 불만을 의식해 그들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자유무역에 반대하고, 노후 보장을 위한 사회보장연금을 지지한다. 반면, 크루즈는 공화당 상류 엘리트들의 경제적 이해 부분에서는 절대로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오히려 더 강경하게 밀어붙인다. 이는 크루즈가 ‘화장한 트럼프’일 뿐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아니, 트럼프가 이리라면, 크루즈는 호랑이라고 할 수 있다.
크루즈는 2000년대 이후 미국 풀뿌리 보수주의운동인 티파티가 낳은 최대 기린아다. 트럼프 이전에 이미 크루즈가 있었다. 트럼프는 미국 보수화의 산물인 크루즈가 얼굴에 칠한 화장을 지우고, 더 솔직히 대중에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트럼프와 크루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국 중하류층들이 감정적으로는 트럼프에게 더 끌리는 게 당연하다. 공화당의 비극이고, 미국의 비극이다.
정의길 국제뉴스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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