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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과거를 떠나보내는 용기

등록 2016-04-22 19:02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꿈에게 길을 묻다>, 고혜경 지음
나무연필, 2016
오승욱 감독의 <무뢰한>(2014)을 보고 또 보고 있다. ‘술집 여자’(전도연)는 단란주점 홍보용 사탕봉지를 접다가 호출을 받고 나간다. 형사(김남길)는 여자의 칼을 맞고 “나는 내 일을 한 것뿐이지, 당신을 배신한 게 아냐”라고 말한다. 두 장면은 빚이 5억인 여자의 현실과 남자의 죄의식과 혼란을 요약한다. 빚과 죄의식은 과거의 상징, 이들의 삶은 과거의 후유증일 뿐이다. 외로움과 생존의 질서(무뢰한, shameless)에 의존해 과거 위에 주저앉아 있다. 주인공과 같은 처지, 아니 과거 집착형 인간인 나는 이 영화가 너무 좋다. 얼마나 사는 인생이라고 그 어려운 극복을 하고 살아야 하나.

과거의 연속이 나다. 그러니 삶은 언제나 과거다. 과거를 어떻게 지고 갈 것인가. 경험의 차이도 크고 개인의 역량도 변수다. 나는 한심하게도 특정한 종류의 인간형을 경멸하는 데 열정을 쏟는 ‘뒤끝의 끝판왕’이다. 그 증오가 현실화될 리 없으니 민폐와 망신을 반복한다. 과거의 모욕이 상기될 때마다 <흑사회> 시리즈의 두기봉과 코언 형제의 영화(<파고>)에 나오는 믹서기나 탈곡기에 ‘웬수’를 갈아버리는 꿈에 시달린다.

나의 사소한 과거도 이토록 괴로운데 그 과거가 4·3, 광주민주화운동, 세월호 참사처럼 집단 폭력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개인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면? <꿈에게 길을 묻다>는 신화학자이자 그룹투사 꿈 작업가인 저자가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만난 ‘5월의 꿈’(80년 5월의 악몽)을 꾸는 이들과 “트라우마를 넘어선 인간 내면의 가능성을 찾아”(부제) 나선 기록이다. 이후 여성들의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날 이후 35년 만에 이런 책이 나왔다. 관련 전문가가 절대 부족한 한국 사회에서 저자의 사명감과 헌신, 녹취록이라는 까다로운 원고를 역사의 한 페이지로 만든 편집자의 정성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널리 읽히길 바란다. 이 시대가 그토록 바라는 치유의 실마리가 여기 있다. 융 전문가인 저자가 거듭 강조하는 바는 좋은 꿈, 나쁜 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꿈은 우리 내면의 진실을 속삭인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공감한 말은 “삶은 과거를 떠나보내는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214쪽)이다. 우리는 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과거가 나보다 세니까. ‘과거와 나’라는 저울이 있다면 압도적으로 과거로 기울어진다. 균형이 안 잡히니 현실 적응이 안 되고 아프고 스스로 세상을 버린다. 용기가 필요하지만 누구나 용기를 내지는 못한다. “정글에 갓난아기가 옷도 없이 버려져 있었어요. 뱀과 해충이 우글거리는데 그 장면을 보면 누구나 아이를 안아 올린대요. 그런데 아이 몸에 지뢰가 연결되어 있고 아기를 구하려던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요”(190쪽). 베트남전에서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과거를 떠나보내기가 쉬운 일이겠는가. 나는 극복하는 사람이 정상으로 간주되는 사회가 더 끔찍하다.

5·18 관련자들만이 아니라 악몽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있다. 악몽의 주된 내용은 마비다. 의식은 있으나 손이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다. 가장 비열한 폭력, 두 사람이 한 사람의 사지를 붙잡고 다른 한 사람이 묶인 이를 맘대로 때리게 하는 구조. 피해자에게 완벽한 무기력을 경험케 하는 것이다. 그다음, 사람들은 ‘국민’의 이름으로 피해자를 비난한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이 책의 필독 그룹 중 하나는 정치인들, 특히 야당 관계자다. 역사적으로 박정희를 비롯해 대통령은 호남에서 ‘만들었지만’, 디제이(DJ)를 포함해 노무현까지 사연은 달랐으나 호남의 양팔을 묶고 이를 “전국정당”, “지역감정 해소”라고 주장했다. ‘약자’가 ‘약자’를 강자에게 내주는 것. 5·18의 시작은 전두환의 총칼이었지만 이후의 폭력은 칼보다 더한 ‘말’이었다. 이 책은 그 악몽을 극복하려는 이들의 용기의 기록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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