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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혜정 칼럼] 강남역과 구의역, 다시 신을 불러오며

등록 2016-06-07 20:26수정 2016-06-08 13:25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신을 불러온다. 원시부족사회에서 자식이 벼락 맞아 죽었을 때 부모는 왜 하필 내 아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했는지 물으면서 애통해하지만 하늘의 큰 질서를 믿기에 그 사실을 승인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최근 들어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신의 큰 질서가 여기에 있지 않은 것 같아선지 그 애통함은 사라지지 못한다. 돈의 뜻이 사람들을 죽이는 세상. 강남역과 구의역에서 세상을 뜬 영혼을 위해 삼가 애도를 표하면서 이 글을 쓴다.

여행 중이던 나는 기자들과 전화 통화로 5·17 강남역 사건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물었다. “이 사건이 묻지마 살인입니까, 여성혐오 범죄입니까?” 나는 전화통 너머로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당연히 묻지마 살인이고 여성혐오 살인이지 어떻게 그런 질문이 가능하냐고. 나중에 그 질문이 경찰의 발표문에 의해 유도된 것임을 알았다. 복합적인 계급갈등을 젠더 충돌로만 몰고 가는 구도도 이와 비슷하게 우리의 현실인식을 방해한다.

근대는 중세적 신분제와 성별 고정관념으로부터 해방되는 역사이다. 대한민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1996년 즈음 남녀 대학생 비율이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물밀듯 밀려오는 글로벌 시장의 압력에 그나마 발빠르게 대응한 이들은 유연한 고학력 여성들이었다. 사법시험과 공무원 고시에 여성의 진출이 눈부셨고, 마침내 폐쇄적 인맥과 결탁이 판을 치는 법조계와 공직사회에 변화가 오리라는 기대감도 커졌다. 성추행과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여성혐오가 무엇인지를 깨우쳐가는 시간이 이어졌다. 낯선 조직사회에 진입한 여성들은 토건적이고 위계적인 조직문화를 불편해했고 바꾸고자 했다. 이때 청년 남성들이 같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청년 남녀가 한편이 되어서 기득권에 맞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요구하였다면 조직의 합리화를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고, 지금쯤은 대량실업 시대를 넘어설 기본소득 운동을 함께 벌이며 시대전환을 해내고 있지 않았을까?

불행하게도 그런 협력관계는 미처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 위기로 ‘생존 위기’에 봉착한 남성 청년들은 오히려 돈과 권력을 가진 가부장의 품에 안기는 길을 선택했다. 2007년 <88만원 세대> 책을 통해서 더 이상 가장으로 아내와 두 아이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남자들은 그 예언을 받아들이기보다 숨 가쁘게 스펙을 쌓았고 쉬지 않고 달리면서 ‘여전히’ 아버지 같은 가장이 되는 꿈을 꾸었다. ‘평범한 가장’으로 산다는 것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그 꿈에 집착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 꿈을 향해 달리기로 한 청년들은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고 함께 협력하기보다는 화풀이와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다. 아무런 보호막 없이 홀로 절벽 앞에 선 남성들이 만들어내는 혐오와 적대의 정치가 바로 강남역 참사에서도 드러났다.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위기가 일상화된 시대에 ‘안전’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지만, 과거의 틀로 지금의 경험을 설명할 수 없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한 때다. 삶을 일구려 노력할수록 삶이 파괴되는 시장질주사회의 본성을 파악하고 한동안 퇴행을 거듭할 시대를 살아낼 힘을 키워야 한다. 세상이 좋아질 수 없으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모두를 집어삼킬 혐오와 적대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함께 질문하고 위로할 동료를 찾아나서야 한다. 이 모든 불행이 시장을 숭상하는 정권 탓만은 아니라는 것, 모든 것을 책임지며 스스로 신이 된 나 자신, 따질 줄은 알지만 이해와 공존의 능력을 키우지 못한 나를 인식하기 위해서라도 나/우리는 역으로 가야 할 것이다. 강남역에 여성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남성들의 추모 행렬이 이어지면 좋겠다. 구의역에 청년들과 연대하려는 장년과 노년들의 행렬이 이어지기를 기도한다. 종교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려는 종교인들과 함께 다시 신을 불러올 수 있기를!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디스팩트 시즌3 #5_언론은 왜 성폭력 가해자 시각에 복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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