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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재봉의 문학으로] 역사학자 도진순의 육사 시 해석

등록 2016-06-16 17:33수정 2016-06-16 19:32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인문학 위기의 요인을 밖이 아니라 안에서 찾는다면 분과 학문 사이의 높은 장벽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대학의 학과 또는 학부로 표현되는 작은 영토 하나씩을 차지한 학자들이 제 구역을 사수하며 스스로도 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과 간여를 자제하는 식의 ‘평화 공존’이 학문의 왜소화와 파편화를 불러온 범인으로 꼽힌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학자인 도진순 창원대 교수의 이육사 시 연구 작업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도 교수는 지난봄 육사의 대표 시 ‘청포도’와 ‘절정’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담은 논문을 <역사비평>과 <민족문학사연구>에 실었고 육사의 한시 ‘만등동산’과 ‘주난흥여’에 관한 논문 역시 <한국근현대사연구>에 발표했다. 특히 ‘청포도’에 나오는 “손님”을 독립운동가 윤세주로 특정한 것은 역사학자다운 실증 작업의 결과라 하겠는데, 이와 관련해 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교수는 <문예중앙> 여름호 연재글 ‘현대시 산고’에서 “도진순의 부지런한 탐구 덕택에 독립열사 윤세주가 이 모든 그리운 손님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형상이 되어, 바다를 건너, 저 포도넝쿨 사이로 우리에게 걸어오게 된 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황 교수는 “다만 문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손님이 반드시 윤세주로 국한될 수는 없다”는 말로 역사학자의 작업이 지니는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도진순 교수의 육사 연구는 여름에도 이어졌다. 그는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기고한 ‘육사의 유언, ‘광야’: ‘죽어서도 쉬지 않으리’’에서 육사의 또 다른 대표작인 ‘광야’ 해석에 도전했다. 도 교수의 육사 해석은 육사의 문학이 그의 독립투쟁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일관된 전제 아래서 이루어지며 그런 관점에서 그는 황현산 교수의 ‘광야’ 해석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황 교수의 ‘광야’ 해석은 지난해 11월에 낸 책 <우물에서 하늘 보기>에 실렸는데, “하늘의 섭리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진보를 믿는” 인본적·진보적 역사관이 핵심이었다. 이에 대해 도 교수는 황 교수가 ‘광야’ 해석의 근거로 든 콩도르세류의 근대화 노선에 육사는 비판적이었다며 “콩도르세의 길은 육사를 광야에서 해방시키는 길이 아니라, 광야로 되돌리는 길이었다”고 반박했다. 도 교수는 이 시의 제목 ‘광야’가 흔히 오해되는 대로 너른 벌판을 뜻하는 ‘廣野’가 아니라 ‘척박한 땅’을 가리키는 ‘曠野’이며, 따라서 이 시의 공간은 중국 만주 벌판이 아니라 “제국의 억압에서 해방되어야 하는 식민조국”이라고 주장한다.

‘광야’와 함께 ‘나의 뮤-즈’와 ‘꽃’을 육사가 베이징 감옥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에 쓴 ‘절명시 3부작’으로 분류하는 도 교수는 나머지 두 작품을 다룬 논문 역시 각각 <국어국문학> 175호와 <한국시학연구> 46호에 발표했다. 그는 “몇 천 겁 동안”이라는 구절이 포함된 ‘나의 뮤-즈’를, 육사가 불교의 음악신 건달바에 자신을 가탁해 “자신의 과거를 노래한 비명(碑銘)”이라고 해석했다. 또 육사 생애 마지막 시로 추정되는 ‘꽃’에 나오는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이 건달바가 노래하는 제석천의 도리천궁이라는 전제 아래, “먼저 간 동지들이 수미산에 가 있다는 믿음의 만가요 그들의 넋을 애절하게 부르는 초혼가”로 이 시를 이해한다.

문학평론에 해당하는 역사학자 도진순의 집중적인 작업, 그리고 그에 대한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대화’는 학제간 벽과 틀에 가로막힌 인문학의 숨통을 틔워 줄 소중하고 생산적인 시도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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