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은 1945년 또는 1953년에 일어났던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까지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잠식하는 상시적 압박이다. 당장의 재난을 넘기기 위한 가건물 같은 인생을 영구히 계속할 수는 없다. 미래를 향해 장기적으로 구상되지 않은 임시적 삶은 불안과 위험에 무방비다.
며칠 전 임화문학연구회 모임에 나갔다가 그 자리에 참석했던 손유경 교수(서울대 국문학과)로부터 신간 저서 한 권을 기증받았다. ‘미학적 실천으로서의 한국 근대문학’이라는 야심적 부제가 붙은 <슬픈 사회주의자>(소명출판)가 그것인데, 집에 돌아오자 곧 서론이자 총론에 해당하는 제1장을 읽고서, 평소 나도 관심을 가져온 문제에 대해 손 교수가 새롭고도 의표를 찌르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의 논의를 말머리 삼아 그의 주제와는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건방진 소리 같지만 우리나라는 지금 시인다운 시인이나 문인다운 문인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아니, 세상의 지론이라고 본다. ‘알맹이는 다 이북 가고 여기 남은 것은 다 찌꺼기뿐이야’라는 말을 나는 과거에 수많이 들었고 내 자신도 했고 아직까지도 역시 도처에서 그런 인상을 받고 있다.”
손 교수는 시인 김수영이 ‘시의 뉴프런티어’(<사상계> 1961년 3월)라는 에세이에 썼던 위의 구절을 인용하여 문제를 제기하는데, 1930년대 문단의 “카프 출신 문인뿐 아니라 내로라하는 모더니스트들까지 월북의 대열에 합류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를 묻는 것이 그의 논의의 출발점이다. 사실을 말하면 김수영보다 20년 아래인 나도 문학청년 시절 자주 듣던 얘기의 하나가 똑똑한 문인은 다 북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손 교수의 새로운 점은 월북 문인들이 “북한을 선택했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의 터전을 버렸다는 사실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통해 월북 문제에 다르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김남천·박태원·이태준·송영·안회남·지하련 등을 표본으로 택하여 그들의 삶과 문학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이라는 틀에 박힌 진영논리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미학적 실천’의 차원에서 탐색하고 그것으로부터 월북의 심리적 또는 논리적 근원을 찾아보려 하는 것이다. 요컨대 손 교수의 목표는 월북사건 자체의 해명이라기보다 그 전단계인 1930년대 문학의 심층을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시선은 그냥 월북에 머문다. 먼저 지적할 것은 문인들의 월북이 김수영이 노골적으로 말했고 내가 은밀하게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안이라는 점이다. 알다시피 8·15 이후 한반도에서는 통일된 독립정부의 수립이 무산된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거꾸로 남과 북 양쪽 모두에서 주민 절대다수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다. 북에서는 소련군의 엄호 아래 김일성 정권의 탄생을 위한 일사불란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유산계층의 재산 몰수와 토지개혁, 친일잔재의 청산, 종교 탄압 등이 그런 것인데, 이에 따라 1945~49년 사이에 400만 내외의 주민이 월남했으리라 추산된다. 반면 남에서는 미군정의 정치적 무지에다 일제 식민관료와 친일경찰의 온존, 좌우의 극한대립과 사회 혼란 등으로 인해 민주국가 건설의 희망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월북자는 월남자의 10분의 1 이하라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이태준·임화·김남천·이원조 등 1930년대의 주요 문인들 다수가 새로운 파시즘체제의 등장에 좌절하여 이때 월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런 복합적 상황의 일부였던 것이다. 김동명·안수길·황순원·구상 등은 이태준·임화에 비해 문단적으로 후배이고 지명도에서도 그들에 훨씬 못 미치지만, 여하튼 그들이 해방기 북한의 현실을 잠시나마 몸으로 겪고 월남했다는 사실도 월북과 더불어 고려할 사항이다.
6·25전쟁 동안에는 또 다른 대이동이 행해졌다. 미군 폭격을 피해서 또는 공산정권이 무서워서 월남한 사람이 50만~60만명 정도라고 하는데, 가령 1950년 12월의 유명한 흥남철수에서만 9만1천명의 난민이 미군 함정으로 남쪽으로 내려왔다. 유감스러운 것은 평소 큰소리치던 이승만 정부가 전쟁이 나자 극소수 요인들만 데리고 몰래 남쪽으로 도주해버리는 바람에 각계각층의 많은 인재들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북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http://www.kwari.org)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약 9만6천명이 전시 중 납북되었다 하는데, 문단에서는 이광수·김억·박영희·김동환 등 원로들이 여기 포함된다. 정지용과 김기림은 한때 월북 문인으로 취급되었으나 전쟁 초기에 납북되었음이 확실해 보인다.
자, 그러면 이 모든 현상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얻어낼 오늘의 교훈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나는 1945~1953년 기간에 발생한 월북과 월남이 이념적으로는 정반대 방향인 듯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해방 당시 나는 네살이었는데, 반년쯤 뒤에 아버지의 인솔하에 10여명 가족이 고향 속초를 떠나 월남했다. 우리 가족을 태운 밀항선이 새벽어둠이 가시기 전의 주문진항에 닿던 광경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런데 아버지보다 열살 아래의 29살 작은아버지는 월남에 반대하고 남았다가 결국 북쪽 체제를 택했고, 위안부로 끌려가는 걸 피해 어린 나이에 일찍 결혼한 큰누나는 남편 따라 속초에서 그대로 살다가 남쪽 주민이 되었다. 우리가 피난 나와서 먼저 자리 잡은 곳은 태백산 아래 봉화군 춘양이라는 곳이었고, 종전 후 이사한 곳은 계룡산 가까운 공주였다. 둘 다 <정감록>의 ‘십승지지’ 근처로서, 생각해보니 그동안 우리 가족은 계속 피난을 다닌 셈이었다. 한반도 남북으로 흩어진 언필칭 ‘1천만 이산가족’과 그들의 자손들, 또 미국·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해 세계 곳곳으로 떠나간 수백만 이주민들, 그들의 삶도 따지고 보면 피난 아닌가.
지난날 문인들의 월북·월남은 분단시대 초기 자기들의 발 디딘 땅이 숨 막히는 불모지로 화해가던 특정한 상황에서의 불가항력적 선택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분단은 1945년에 또는 1953년에 한번 일어났던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까지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잠식하는 상시적 압박이다. 더욱이 최근 7, 8년 동안에는 누구나 실감하듯 분단 이후 최악의 위기가 한반도를 덮치고 있다. 갈라진 동포의 곤경에 마음 아파하기는커녕 동족의 상처에 소금까지 뿌리고 다니는 지도자야말로 분단의 외화된 존재이다.
당장의 재난을 넘기기 위해 급한 대로 우선 지어놓은 가건물 같은 인생을 우리가 영구히 계속할 수는 없다. 미래를 향해 장기적으로 구상되지 않은 임시적 삶은 당연히 불안과 위험에 무방비일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엄청난 물질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감정과 정신이 날로 저열하고 황폐해진다고 느껴지는 것은 다들 ‘마음의 정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예로부터 항심(恒心)의 근거가 항산(恒産)이라 하는데, 이때 ‘항산’은 단지 일정한 재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인간에게 ‘한결같은 마음’의 가능성을 보장해주는 조건들, 가령 실직을 하거나 중병이 들어도 생계가 통째로 무너지지는 않으리라는 보장, 동료와 이웃이 느닷없이 칼을 들고 달려들지는 않으리라는 믿음, 힘들거나 지쳤을 때 가족과 친구의 위로가 있으리라는 기대, 6·25전쟁 같은 사태가 돌연히 일어날 리 없다는 확신,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에게 삶의 지속을 담보하는 사회적·심리적 ‘항산’일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이 말했던 이 우연히 ‘던져진 땅’을 그래도 미치거나 자살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낼 만한 곳으로 바꾸자면 그런 ‘항산’의 지속적 확보를 위한 공동체의 노력에 동참하는 것이 우리 인생길의 필수가 되어야 한다.
염무웅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