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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덕기자 덕질기] 패자는 카운터로

등록 2016-07-27 19:34수정 2016-08-09 14:46

전종휘
디지털콘텐츠팀 기자

문제 하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자장면은? 국내 1200만 당구 동호인들은 정답을 안다. 바로 ‘당구장에서 먹는 자장면’이다. 어느 토요일 점심때 거실에서 두 아들과 당구를 치던 중 우리는 그 의식을 치르기로 모의했다. 하지만 배달된 자장면을 잘 비벼 한 젓가락 뜨는 순간 내 혀를 의심해야 할 상황이 벌어졌다.

당구장에서 먹던 그 맛이 아니다. 이유가 뭘까? 치열한 고민 끝에 나는 우리 집 당구대엔 타이머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동네 당구장에서 친구나 동료들과 칠 때는 항상 게임비를 계산하기 위해 설치된 타이머 버튼을 누르고 ‘째깍째깍’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자장면을 먹는다. 당구장 자장면이 맛있다고 느낀 이유는 그 긴장의 순간 몸에서 분비되는 아드레날린 때문이라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타이머도 없고 게임비 낼 일도 없는, 한가한 거실 당구대 자장면이 맛 없는 이유다.

그렇다 보니 거실 당구대엔 없는 게 또 하나 있다. ‘패자는 카운터로’라는 숙명적 문구다. 동네 당구장 벽마다 붙어 있는 이 문장은 당구게임에 긴장을 불어넣어 손님들로 하여금 계속 치게 만들려는 당구장 주인들의 깜찍한 상술인 동시에 게임비 떼어먹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다.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인근 당구장 벽에 붙은 글귀. 냉혈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문장은 다양하게 변주된다.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인근 당구장 벽에 붙은 글귀. 냉혈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문장은 다양하게 변주된다.

어떻게 보면 냉정하기 그지없는 이 글귀가 눈에 크게 거슬리지 않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패자한테 전적인 책임을 묻는 냉혈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패자한테 끊임없이 카운터로 갈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자본과의 싸움에서 진 노동은 계속 외주화와 파견이라는 이름의 카운터로 내몰린다. 흙수저 젊은이들은 저임금 불안정 노동의 카운터로, 노인들은 폐지를 줍든 무얼 하든 평균 71살까지 뼈 빠지는 황혼노동의 카운터로, 운 좋게 정규직 자리를 잡고 노동조합에 가입한 이들은 ‘귀족 노동자’라는 이데올로기의 카운터로 토끼몰이 당하는 사회를 우린 살고 있다.

순자산 1억원도 안 되는 우리 집의 거실에 당구대가 납신 배경은 간단하다. 기껏해야 철근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한 아파트의 노예가 되어 은행 빚에 가슴 졸이고 집값 하락에 벌벌 떨며 평생을 살라는 서울의 지배 논리에 극심한 혐오를 느낀 자가 지방 소도시로 이주를 결단한 결과일 뿐이다. 지방을 식민지처럼 지배하는 중앙 논리를 극복하지 못해 지방행을 선택한 패자한테 이 정도 덤은 주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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