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반비, 2016 지금 이 시대를 견디는 요령 중 하나는 매사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아파도 위로를 구하지 않으며, 남의 고통도 모른 척한다. 내가 당하는 모욕과 상처, 타인의 호소, 분노와 절망의 세상사에 반응하다가는 열사(열받아 죽음, 熱死)하기 십상이다. 반응은 용감하지만 두렵고 책임져야 하는 삶이다. 사람들은 “잊어라”, “신경 쓰지 마라”, “티브이 채널을 돌려라” 하며 공모한다. 매일 “모른 척” 여부를 놓고 씨름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고통에는 목적이 있음을. 고통이 없다면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151쪽). 운이 좋다면 반응하는 삶이 고난의 늪을 건너게 해주고 나를 타인과 연결해줄 수 있다. 이것이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치유, ‘멀고도 가까운(The Faraway Nearby)’ 이야기다. 이 책은 이야기에 대한 독특한 통찰이자 무수한 잠언으로 가득 찬 에세이다. 서평 쓰기가 폭력적으로 느껴지거나 메모하다가 지치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이 그렇다. 요약도 소개도 쉽지 않은 깊은 사유다. 그나마 한국어 부제가 나를 도와준다.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대하여’. 위 네 가지에 도달할 수 있는 진입로는 감정이입(感情移入, em/pathy)이다. 대개 공감(共感, sym/pathy)이라고도 하는데, 감정이입이 정확한 표현이다. 우리말에서 공감이 공정하고 사회적인 어감이 강한 반면, 감정이입은 들어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가는 듯한 ‘감정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더욱 ‘이입’이 중요하다. 감정이입은 글자 그대로 감정이 이동하여 다른 곳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여행, 공간적 단어다. 하나의 장소가 곧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는 지형을 이루고, 감정이입은 그 안에서 상상하는 행위다. 감정이입은 이야기꾼의 재능이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는 방법이다(13쪽). 남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함께 느끼고, 상대를 위해 느낀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은 나도 당사자가 되는 ‘엄청난’ 일이다. 감정이입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나와서 여행하는 일,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일이다. 감정이입을 두려워한다면 성장할 수 없다. 타인의 속으로 들어가야 타인의 현실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시각적이다. 단어의 어근 ‘path’는 그리스어에서 열정이나 괴로움을 뜻한다. 비애, 병리학, 동정 같은 단어의 어원이 모두 같다. 감정이 ‘오솔길’을 뜻하는 고대 영어 ‘path’와 동음이의어라는 사실은 우연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감정이입은 우리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면서 그곳에 가보고 싶은 욕망의 여정이다(296쪽). ‘이야기’는 곧 읽기와 쓰기다. 반응하지 않는 감정이입 없는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그러지 않아야 더 잘 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뇌는 진공 상태다. 글이란 자기 생각을 외부로 물질화하는 일인데, 생각이 없다면? 생각 없는 글쓰기가 가능하고 심지어 널리 읽히는 세상이다. 나도 이 글을 쓰면서 책의 핵심적인 내용은 피했다. 생각하기 힘겨웠기 때문이다. 엄마와 딸, 죽어가는 엄마의 이야기. 이 책의 지은이는 미국의 유명 작가이자 역사가, 사회운동가인 리베카 솔닛이다. 남성을 ‘꼰대’로 규정했지만 여성의 구매력을 보여준 베스트셀러,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저자이다. 김명남의 번역은 너무 점잖다. “… 가르치려 든다”는 오역이다. 인간은 남녀노소 불문,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남자들의 진짜 문제는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
※ 이 지면에 매주 등장했던 상담자 성폭력 사건은 토론회, 법제화 등을 통해 곧 사회의제화될 예정이다. 나는 이제 그들의 폭력, 사기, 갈취에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도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매일 듣고 버틸 수 있단 말인가.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반비, 2016 지금 이 시대를 견디는 요령 중 하나는 매사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아파도 위로를 구하지 않으며, 남의 고통도 모른 척한다. 내가 당하는 모욕과 상처, 타인의 호소, 분노와 절망의 세상사에 반응하다가는 열사(열받아 죽음, 熱死)하기 십상이다. 반응은 용감하지만 두렵고 책임져야 하는 삶이다. 사람들은 “잊어라”, “신경 쓰지 마라”, “티브이 채널을 돌려라” 하며 공모한다. 매일 “모른 척” 여부를 놓고 씨름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고통에는 목적이 있음을. 고통이 없다면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151쪽). 운이 좋다면 반응하는 삶이 고난의 늪을 건너게 해주고 나를 타인과 연결해줄 수 있다. 이것이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치유, ‘멀고도 가까운(The Faraway Nearby)’ 이야기다. 이 책은 이야기에 대한 독특한 통찰이자 무수한 잠언으로 가득 찬 에세이다. 서평 쓰기가 폭력적으로 느껴지거나 메모하다가 지치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이 그렇다. 요약도 소개도 쉽지 않은 깊은 사유다. 그나마 한국어 부제가 나를 도와준다.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대하여’. 위 네 가지에 도달할 수 있는 진입로는 감정이입(感情移入, em/pathy)이다. 대개 공감(共感, sym/pathy)이라고도 하는데, 감정이입이 정확한 표현이다. 우리말에서 공감이 공정하고 사회적인 어감이 강한 반면, 감정이입은 들어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가는 듯한 ‘감정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더욱 ‘이입’이 중요하다. 감정이입은 글자 그대로 감정이 이동하여 다른 곳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여행, 공간적 단어다. 하나의 장소가 곧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는 지형을 이루고, 감정이입은 그 안에서 상상하는 행위다. 감정이입은 이야기꾼의 재능이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는 방법이다(13쪽). 남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함께 느끼고, 상대를 위해 느낀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은 나도 당사자가 되는 ‘엄청난’ 일이다. 감정이입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나와서 여행하는 일,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일이다. 감정이입을 두려워한다면 성장할 수 없다. 타인의 속으로 들어가야 타인의 현실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시각적이다. 단어의 어근 ‘path’는 그리스어에서 열정이나 괴로움을 뜻한다. 비애, 병리학, 동정 같은 단어의 어원이 모두 같다. 감정이 ‘오솔길’을 뜻하는 고대 영어 ‘path’와 동음이의어라는 사실은 우연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감정이입은 우리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면서 그곳에 가보고 싶은 욕망의 여정이다(296쪽). ‘이야기’는 곧 읽기와 쓰기다. 반응하지 않는 감정이입 없는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그러지 않아야 더 잘 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뇌는 진공 상태다. 글이란 자기 생각을 외부로 물질화하는 일인데, 생각이 없다면? 생각 없는 글쓰기가 가능하고 심지어 널리 읽히는 세상이다. 나도 이 글을 쓰면서 책의 핵심적인 내용은 피했다. 생각하기 힘겨웠기 때문이다. 엄마와 딸, 죽어가는 엄마의 이야기. 이 책의 지은이는 미국의 유명 작가이자 역사가, 사회운동가인 리베카 솔닛이다. 남성을 ‘꼰대’로 규정했지만 여성의 구매력을 보여준 베스트셀러,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저자이다. 김명남의 번역은 너무 점잖다. “… 가르치려 든다”는 오역이다. 인간은 남녀노소 불문,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남자들의 진짜 문제는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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