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에디터 최근 재벌들을 보면 과연 총수들이 경영에 전념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불과 20년 전 산업계를 취재할 때 느꼈던 분위기와 견주면 현격한 차이가 있다. 당시에는 무리하게 돈을 빌려서라도 투자를 하겠다고 덤벼들었는데, 지금은 돈이 금고에 차고 넘쳐도 새로운 사업기회를 찾는 데 소극적이다. 산업이 성숙하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겠으나, 현실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주요 재벌가 중에서 지금 경영권 분쟁이나 승계를 둘러싼 문제들에 휘둘리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총수들이 여기에 정신이 팔려 있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이런 현상은 재벌들이 창업가와 2세 시대를 마감해가면서 경영능력이 검증도 되지 않은 3, 4세로의 승계를 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이 일군 부를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욕망을 갖기 마련이다. 재벌들처럼 거대한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은 그 정도가 더할 것이다. 문제는 재벌들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이것이 큰 부작용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재벌 총수들이 대부분 ‘전과자’인 것은 역설적이게도 돈 때문이다. 기업 규모가 커지면 그 기업을 지배하는 데 더 많은 돈이 들게 된다. 일정 지분 이상의 의결권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그 기업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려면 상속·증여세까지 내야 해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기업을 자녀에게 물려주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재벌들이 일감 몰아주기 등 온갖 편법을 동원하거나 비자금 조성 등 불법을 저지르는 것이다. 공정하고 활력있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만들어지려면 무엇보다도 유인체계(인센티브)의 설계가 중요하다. 현재의 유인체계는 재벌의 편법을 조장하는 측면이 강하다. 대표적인 승계 방법으로 동원되는 일감 몰아주기의 경우 정부에서 몇년 전 공정거래법과 상속·증여세법을 개정해 처벌 조항을 만들었다. 그러나 처벌 대상 기준이 너무 낮거나, 예외조항이 너무 많고, 처벌 수위도 약하다. 공정거래위가 일감 몰아주기로 처벌한 재벌은 지금까지 현대그룹 한곳뿐이고, 그마저도 과징금 13억원 부과에 그쳤다. 증여세의 경우에도 2014년 일감 몰아주기로 수혜를 받은 재벌 총수 일가의 증여추정이익은 2886억원에 달하지만 증여세 납부는 1025억원에 그쳤다. 재벌들이 처벌에 따른 손해보다 위반으로 얻는 이익이 훨씬 많은 구조다. 재벌들이 스스로 탐욕을 절제할 수 없다면 결국은 법을 강화하고 이를 엄격히 집행하는 수밖에 없다. 혹자는 이것이 반시장적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미국의 사례를 보면, 어느 게 시장적인지 알 수 있다. 미국도 100년 전에는 재벌이 득세했다. 그러나 반독점법과 상속세 등 강력한 법 집행으로 시장질서를 바로잡았다. 석유재벌 록펠러가의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는 1911년 반독점법에 따라 수십개 회사로 분할됐고, 창업가 존 록펠러는 1937년 사망할 때 재산의 70%를 상속세로 납부했다. 그 이후 록펠러 후손들의 지분은 계속 줄어 회사는 전문경영인들에 의해 운영된다. 이런 강력한 법 집행이 오늘날 활력있는 미국 경제의 토대를 닦았다. 마침 국회에서 공정거래법과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국회와 관련 부처들은 이 문제가 해당 재벌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경제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일감 몰아주기와 같은 행태는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회사이익 가로채기)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마저 훔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재벌의 독과점화가 심화하는 반면, 새로운 기업의 성장기회는 박탈되기 때문이다.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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