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상담가·춘해보건대 교수 성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을 피해자라고 부른다. 법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성폭력의 경우에는 당사자를 부르는 용어에 대해 조금 더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다른 폭력의 경우에는 ‘가해자’에게 주의가 기울여진다. 그러나 성폭력의 경우 피해를 겪은 사람에게 더 주의가 기울여져 가해자의 이름이 아니라 피해자의 이름으로 사건이 명명되곤 한다. 나아가 성과 관련된 가부장적 고정관념과 순결이데올로기 같은 가치관으로 인해 성폭력 피해는 평생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피해자를 바라보기도 한다. 우리가 성폭력은 근절되어야 하는 악이라 생각하고, 피해를 겪은 여성이 자신의 피해 경험을 인생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며 잘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어떻게 부르는 것이 도움이 될까? 피해자라는 일반적 용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계기는 피해 당사자인 한 여성이 “‘피해자’는 잘못이 없는데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한테 고통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피해자라는 말 속에는 좌절과 무력감이 들어 있습니다”라며 피해자라고 계속 불릴 때 성폭력이 가져온 무력감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의 핵심은 여러 가지로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이어서 회복 과정이란 주체성과 통제력을 되찾는 과정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피해자로 불린다는 것은 마치 ‘통제할 수 없었던 사람’으로 불리는 것과 같아 회복의 과정에 도움이 되지 않고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성폭력 생존자’라는 용어도 있다. 성폭력 피해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이후의 여러 어려움 속에서 목숨을 잃지 않고 또는 목숨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은 자라는 의미로 부르는 호칭이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처절함도 느껴지지만 피해를 능동적으로 극복하고 당당해졌다는 자부심도 느껴지는 이름이다. 그런데 이 이름은 피해를 어느 정도 극복한 사람들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 성폭력을 막 경험한 사람부터 리우올림픽 유도에서 금메달을 딴 미국 유도선수 케일라 해리슨처럼 성폭력을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경험 중의 하나로 통합하여 자기실현도 하고 다른 피해 여성도 돕게 된 사람까지, 성폭력을 겪은 모든 사람을 지칭하기에는 충분히 포괄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성폭력 피해 경험자’라는 용어의 사용을 제안하고 싶다. 경험 해석의 주체성과 통제력을 당사자인 경험자에게 주자는 의도이다. 성폭력은 나쁜 경험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경험해내느냐는 과정은 가부장제 사회가 정의하는 성폭력 피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자의 선택에 있음을 지지하자는 것이다. 니체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강하게 한다”고 했듯이, 나쁜 경험을 ‘독’으로 받아들여 무력해지거나 죽을 수도 있지만, 나쁜 경험을 ‘약’으로 전환시키기로 선택함으로써 강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언어의 차원과 존재의 차원은 다른 것이지만, 언어에는 존재의 결을 다르게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과 사물을 부를 적절한 이름을 찾으려고 하고,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가에 민감한 것이다. 우리가 ‘성폭력 피해 경험자’라는 언어로, 성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을 위해 상처를 힘으로 전환시킬 여지가 있는 존재의 집을 작게라도 지을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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