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지성팀 선임기자 “이제 돌아가서, 젊은 아이들을 가르치자. 내 나라 글, 내 나라 말, 내 나라 풍습과 역사를 가르쳐서 우리에게도 잃어버린 나라가 있음을, 아니 되찾아야 할 조국이 있음을 알려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겪은 고난을 가르치고 기억하게 할 거다. 어제를 잊은 자에게 무슨 내일이 있겠는가.” 한수산의 장편소설 <군함도> 말미에 징용으로 끌려왔던 주인공 지상이 핵폭탄 공격을 받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하며 곱씹는 다짐이다. 소설은 그의 귀국 장면까지 담지는 못하고 마무리되는데, 아마도 지상은 다짐처럼 귀국해서 아이들에게 조국의 고난의 역사를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교육은 아무래도 불충분했던 모양이다. 독립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를 뤼순이 아니라 하얼빈으로 잘못 알고 있으니 말이다. 명색이 광복절 축사에서 대통령은 또 식민지배의 상징과도 같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지상이 다짐했던 교육의 역할이 여전히 긴요하다는 뜻이겠다. 교육이 반드시 교육자의 몫인 것만은 아니다. 소설을 비롯한 문학 작품도 어느 정도는 교육적 효과를 지닌다. 대통령의 무지와 걸그룹의 욱일승천기 소동,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이 원치 않는 화해·치유재단에 대한 일본의 10억엔 출연 등으로 어수선한 광복절 주간을 보내면서 소설 두 편에 주목하는 것이 그 때문이다. 한수산 소설 <군함도>는 나가사키에서 멀지 않은 탄광섬 하시마를 무대 삼아 조선인 징용공들의 수난과 저항을 그린다.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은 위안부 출신 할머니를 등장시켜 진정한 화해와 치유가 무엇일지를 따져 묻는다. “장병들이 성병 때문에 전투능력이 저하되는 것을 우려해 실시되었다는 것이 종군위안부 제도다. 일본군은 그들의 군대가 가는 곳에 일본인 창녀만이 아니라 조센삐, 만삐라고 부르는 조선이나 만주 출신 여성들을 노예처럼 가두어놓고 공공연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군함도>) “옷을 겹겹 껴입어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한길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아래를 드러내놓고 차갑고 단단한 땅 위에 누워 있는 것 같을 때가.”(<한 명>) <군함도>는 위안부가 아니라 징용 문제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지만, 여기에서도 위안부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는 않는다. 징용과 위안부 문제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인 것이다. <한 명>에서 인용한 대목은 저 잔인하고 끔찍한 세월로부터 70여년을 떠나왔음에도 여전히 수치와 분노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당사자의 시린 내면을 헤집어 보인다. 이들 징용공과 위안부의 맞은편에 친일 군상이 놓인다. “천황폐하의 은혜에 보답하라면서 시국강연이랍시고 떼 지어 돌아다니며 청년들을 전선으로 내몬 자들, 징용으로 묶어 보낸 자들, 그 말을 하던 입과 그 글을 쓰던 손을 나는 잊지 못하리라. 친일. 그건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다. 오직 제 한 몸, 제 일신의 영달을 위해 민족을 팔고, 이웃을 팔고, 저 자신마저 팔아가며 일본을 위해서 바쳤다.” 역시 <군함도> 말미에서 지상이 곱씹는 상념의 일부다. 그 자신 친일 자산가의 아들이면서도 징용에 끌려온 그는 쓰라린 고난을 겪으면서 제 아버지를 비롯한 친일파의 본질과 폐해를 직시하기에 이른다. 이달 초 한국문인협회는 대표적 친일 인사들인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의 문학상을 추진했다가 거센 반발에 부닥쳐 취소하기도 했다. 광복 71주년을 보내면서 <군함도>와 <한 명> 두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는 이렇듯 차고 넘친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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