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칼럼] 박 대통령, 물러설 때를 알아야

정석구
편집인

아마도 대통령 위에 민정수석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통령이 임명한 특별감찰관에 의해 직권남용과 횡령 혐의로 검찰에 수사 의뢰를 당했는데도 꿈쩍 않고 버틸 수 있겠는가.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장차관들은 이제 대통령 심기를 살필 게 아니라 우병우 민정수석의 눈치를 봐야 할 판이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차지철 경호실장이 연상된다.

최근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청와대,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의 ‘우병우 감싸기’는 도를 넘은 지 한참 됐다. 법리적으로 우병우 수석의 위법 여부를 따져 그 결과에 따라 처리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서 버렸다. 하기야 특별감찰관이 우 수석의 거취 문제를 비서실장에게 묻자 한숨만 푹푹 쉬었다고 하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청와대 안에서 민정수석의 거취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이제는 금기가 된 것 같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나 대통령을 위해서나 국민을 위해서나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지금 나라 안팎으론 해결해야 할 무거운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경제 상황이나 사드 배치 결정으로 인한 한-중 관계 경색 등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다. 상황이 이런데도 일개 민정수석의 거취를 둘러싸고 한 달이 넘도록 소모적인 논란이나 벌이고 있는 건 정말 답답한 일이다.

일이 이렇게 꼬이고 있는 데는 ‘우병우 사태’를 바라보는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의 시각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는 엊그제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우병우 민정수석에 대한 잇따른 의혹 제기를 “집권 후반기 대통령과 정권을 흔들어 식물정부로 만들겠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정권 흔들기에 나선 세력으로 ‘일부 언론 등 부패 기득권 세력’과 ‘좌파 세력’을 구체적으로 지목했다. 우병우 사태를 보는 속내를 비교적 솔직하게 내비친 셈이다.

하지만 이는 대단한 착각이다. 만약 부패 기득권 세력 등의 우병우 흔들기가 박근혜 정부를 식물정부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정말로 생각한다면, 우병우 사퇴를 주장하는 새누리당 원내대표나 국회의원들은 뭐가 되는가. 집권 여당이 자신과 한 몸인 집권 세력을 식물정부로 만들기 위해 민정수석을 흔들고 있는 셈이 된다.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 논리다. 우병우 수석에 대한 언론의 의혹 제기는 비리 혐의가 있는 고위 공직자에 대한 문제 제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일개 민정수석 하나가 비리 혐의로 물러난다고 흔들릴 정권이면 일찌감치 문 닫는 게 낫다.

정작 더 큰 문제는 우병우 의혹 제기를, 이 정부를 식물정부로 만들겠다는 ‘부패 기득권 세력’의 음모라고 규정함으로써 사안의 본말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병우 수석에 대한 의혹 제기는 사실 여부를 판단할 필요도 없는 음모가 되고, 우병우 수석은 음모꾼들에게 박해받는 가엾은 희생양이 된다. 프레임을 이렇게 짜 놓으면 앞으로 청와대나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의혹이 제기돼도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우병우 수석을 감싸고 갈 수 있게 된다.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이런 강경책이 성공할 수 있을까. 강하면 부러진다. 민심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국민이 그런 음모론에 넘어갈 바보도 아니다. 물론 일부 언론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권력 창출에 개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권 초기에는 권력과 잘 지내다가 힘이 빠지면 칼날을 들이대곤 했다. 그러나 우 수석을 감싸는 청와대 참모들은 이번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봐야 한다. 권력 유지에 급급해 상황 판단에 사심이 끼게 되면 식물정부가 아니라 아예 ‘뇌사 정부’가 될 수도 있다. 물러나야 할 때 물러서는 게 사는 길이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한 데는 모든 사안을 이분법으로 갈라놓고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해 결코 물러서지 않는 박근혜 대통령의 고집 탓이 가장 클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자칫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법정에서 고 박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알았는데, 박 대통령의 성격은 절대 물러설 줄 모른다. 이제부터 (부마)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명령을 하겠다고 했다.” 그 결말이 어찌됐는지 우리 모두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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