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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잠실 밖으로 던져진 누에

등록 2016-08-26 20:19수정 2016-08-26 20:25

[한겨레] 정희진의 어떤 메모
<사라진 손바닥>, 나희덕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4

지난 8월19일 저녁, 나는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운동장에 있었다. 세월호에서 희생된 학생들이 생활했던 교실(‘기억교실’)과 개인 유품, 책상 등이 2년 4개월, 858일 만에 영원히 사라진다. 안산교육청 별관으로 임시 이전되기 전날, ‘기억과 약속의 밤’ 행사가 열렸다. 시인 나희덕, 가수 이상은, ‘자전거탄풍경’, ‘우리나라’는 눈물로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 책상 위에는 ‘이삿짐’ 박스와 함께 빼빼로, 허니버터 과자, 편지와 꽃들로 수북했다.

학교와 경기도교육청 그리고 유가족 사이에 교실 존치를 둘러싼 갈등은 예고된 일이었다. 그동안 유가족과 살아남은 친구들에게 ‘2학년 1~10반(명예 3학년 1~10반)’, 교실 10개는 기억과 위안의 공간이었다. 반면 교육 관료나 다른 학부모들에게는 사용할 수 없는 공간 혹은 상기하기 싫은 곳일 수 있다.

우리 문화에서 망자의 유품은 치우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세월호는 다르다. 가족들이 기억교실을 그토록 원하는데 학생 수를 줄이는 방법 등으로 교실을 그냥 두면 안 될까. 지금 이 순간에도 그날의 진실이 차근차근 조직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진실 규명에 대한 박근혜 정권의 편집증적 공포가 우리를 이토록 절망케 하는데, 기억교실이라도 계속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이날처럼 많이 운 적이 없다. 무더운 여름밤, 흙바닥 운동장에서 땀과 눈물로 범벅된 내 옷은 소금내가 날 지경이었다. 내 어머니는 2011년 돌아가셨다. 엄마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면, 살 수 없으므로 엄마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호 아이들은 죽었다. 내 가족의 죽음은 인정할 수 없는 ‘비현실’이고, 남의 가족의 죽음은 ‘현실’이었다. 타인의 죽음은 현실적이므로 나는 맘껏 슬퍼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를 안다. 유가족들은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모른다.

나는 엄마의 옷, 병원 엠아르아이(MRI) 필름, 성당 주보, 수첩, 명함, 면 수건까지 단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내가 아직도 탈상(脫喪)을 못했다며 걱정하지만 꼭 탈상을 해야 제대로 사는 것인가? 죽음을 상기하는 물건들(시신, 유품…)은 반드시 태우고 없애야 하는가. 같이 살면 안 되는가. 대신 나는 다른 물건을 사지 않는다. 어차피 삶은 죽음을 향해 가는 길,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먼저 가 있는 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나희덕 시인은 ‘난파된 교실’을 낭송했다. 그녀의 시는 셌고 슬펐다. 나를 비롯해 두터운 독자층을 가진 뛰어난 시인이다. 분출하는 언어가 항상 출렁거린다. 대상과 시인 자신을 동일시하고, 주체와 객체를 자연스럽게 교환하는 자질을 타고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너와 나’ 사이를 고민하고 긴장하면서 넘어서고자 하는 그녀 같은 사람을 우리는 “여성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녀의 시집 <사라진 손바닥>에 실린 “검은 점이 있는 누에”가 생각났다(96~97쪽). “蠶室(잠실)에서 가장 두려운 적은 파리다/ 문을 단단히 닫으라던 어른들의 잔소리도/ 행여 파리가 들어갈까 싶어서였다…/ 누에들이 뽕잎을 파도처럼/ 솨아솨아 베어 먹고 잠이 든 사이/ 파리가 등에 앉았다 날아가면/ 그 자리에 검은 점이 찍히고,/ 점이 점점 퍼져 몸이 썩기 시작한 누에는/ 잠실 밖으로 던져지고 마는 것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교실 이전은, 어른의 잘못으로 나비가 되지 못한 애벌레를 “검은 점이 찍혔다고 누에 집 밖으로 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날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세월호에서 오빠를 잃은 여중생이 오빠랑 같이 있기 위해 주변의 반대를 설득하면서 단원고에 진학하겠다는 호소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사랑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변해 적응하는 것일 뿐. 보고 싶은 오빠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은 소녀의 마음. 그녀는 “기억 투쟁의 약속”을 다짐할 필요가 없다. 죽음과 슬픔의 기억은 애쓰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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