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국
esc팀 기자
공짜로 얻은 ‘피셔 리시버’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날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뉴트롤즈의 <콘체르토 그로소> 앨범을 듣고 있었다. 시디플레이어가 없었기 때문에 소니 휴대용 시디플레이어를 연결해서 말이다. 갑자기 한쪽 스피커에서 소리가 안 나오는 게 아닌가. 오디오 애호가들은 알 것이다. 음악을 잘 듣고 있다가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거의 패닉 상태가 된다.
‘스피커 케이블이 빠졌나.’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선 연결은 이상 없었다. 무턱대고 앰프를 뜯기 시작했다. 남자들한테는 ‘내 손을 거치면 기계가 고쳐진다’는 이상한 자부심이 있다. 나도 그랬다.
앰프를 뜯었지만 알 리가 없었다. ‘텔레비전이 안 나올 땐 때리면 나온다’는 격언(?)을 떠올려 툭툭 치기도 했다. 그래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트랜지스터 쪽 접촉 불량인 듯싶어 드라이버로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순간, 잠시 동안 기억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끝부분이 새까맣게 탄 드라이버가 방구석에 나뒹굴고 난 누워 있었다. 전원 코드를 안 뽑고 앰프 케이스를 열었던 게 화근이었다. 죽을 뻔했다.
결국 나의 첫 오디오는 그날 창고로 향했다. 서울 용산의 한 수리점에 물어보니 그 리시버를 사는 가격과 수리 비용이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한동안 또 앓이가 시작됐다. 오디오란 자동차와 비슷해, ‘급’이 올라가면 그 밑으로 내려가기가 힘들다. 사람의 귀가 그만큼 예민하다. 차라리 음악을 안 들었으면 안 들었지.
그러던 도중 ‘알바’ 자리가 하나 들어왔다. 군복무 전 휴학 상태였는데, 마침 돈벌이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소파 등 가구에 쓰일 원단을 공급하는 업체였다. 말이 알바였지 하루 12시간은 일했던 거 같다. 지금도 대학생 때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하면 “노동 운동을 하셨군요”란 말을 종종 듣는다. 순전히 오디오를 사기 위해서였는데….
아무튼 난생처음 제대로 된 노동을 3개월 하고 200여만원을 벌었다.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오디오를 샀다. 튜너, 시디플레이어, 앰프, 스피커까지 풀 세트였다. 총 160만원이 들었다. 살 때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차나 집 사는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비교하고 또 비교하고….
고민 끝에 당시 오디오 동호회 등에서 가성비가 높은 것으로 추천되던 ‘아남 클래식77’ 시리즈와 금잔디음향의 ‘칼라스 B-2’ 스피커를 골랐다. 스피커는 청음을 하러 갔다가 바로 구매했다. 소리가 정말 좋았다.
오디오를 세팅한 뒤, 처음 틀었던 음악은 딥 퍼플의 ‘스모크 온 더 워터’다. “징징징~” 기타 리프가 터져나왔다. 나도 모르게 헤드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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