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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재봉의 문학으로] 알 권리와 익명의 자유

등록 2016-10-20 17:57수정 2016-10-20 19:21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묻힌 감이 있지만, 이달 초 문학계에서는 큰 사건이 하나 있었다. ‘엘레나 페란테’라는 필명을 쓰는 이탈리아 작가의 정체 폭로를 둘러싼 논란이다. 엘레나 페란테는 이른바 ‘나폴리 4부작’으로 불리는 소설들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가다. 한국에는 그 첫 작품인 <나의 눈부신 친구>가 7월에 번역돼 나왔고 나머지 세 작품도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4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영역판은 한강의 수상으로 유명해진 올해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엘레나 페란테는 1992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는데 정체는 베일에 가려져 왔다. 그런데 이달 2일 이탈리아의 탐사보도 기자 클라우디오 가티가 그의 정체를 확인했다는 ‘특종’ 기사를 내보냈다. 페란테는 다름 아닌 번역가 아니타 라야라는 것. 가티는 페란테의 책을 내는 출판사가 지난 몇년간 라야에게 지급한 금전 기록, 아니타 라야와 그의 남편인 소설가 도메니코 스타르노네의 부동산 구입 내역 등을 조사한 결과를 근거로 제시했다. 가티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인 페란테가 이미 ‘공인’이기 때문에 그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은 독자의 알 권리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가티의 기사가 이탈리아 언론은 물론 미국의 <뉴욕 리뷰 오브 북스>와 독일 및 프랑스 매체에 실린 뒤 사태는 그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치달았다. 특종에 대한 칭찬은커녕 작가의 사생활 침해와 기자의 직업윤리를 둘러싼 역풍이 분 것이다. <뉴욕 타임스>와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 등은 해당 기사의 가치를 부정하고 나섰다. 작가들은 가티의 보도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작가들은 페란테가 익명을 원한다고 거듭 밝혔고 그의 소설 성격상 익명이 필수적이었다며, 익명의 자유를 침해한 가티의 보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남자 기자인 가티가 여성 작가의 정체를 강제로 ‘커밍아웃’시킨 데 대한 여성 작가들의 분노가 특히 컸다. <미 비포 유>의 작가 조조 모이스, <나쁜 페미니스트>의 지은이 록산 게이 등이 대표적이다. “남자인 가티가 여성 작가의 익명성이라는 옷을 찢어발긴 것은 성적인 행위에 가깝다”며 남성 기자의 여성혐오를 지적하는 견해도 나왔다. 가티가 문제의 기사에서 “남편인 작가 스타르노네와 모종의 비공식적 협업을 했을 가능성”을 제기한 데 대해서도 반발이 거세다. 여성 작가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자 모독이라는 것이다.

세계 문학사에서 익명 작가들의 사례는 적지 않다. 브론테 자매와 조지 엘리엇 같은 여성 작가들이 익명을 선호했다. 여성 작가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이었다. 로맹 가리(그 자체가 필명이다)는 에밀 아자르라는 또 다른 필명으로 <자기 앞의 생>이라는 소설을 썼고,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 롤링도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필명으로 추리소설 <쿠쿠스 콜링>을 냈다. 포르투갈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는 무려 70개가 넘는 필명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올해 초 한국에서도 격월간 문학잡지 <악스트>가 ‘익명’ 작가 듀나와 서면 인터뷰를 하면서 작품보다는 그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에 치우친 질문으로 듀나 자신과 독자들의 반발을 사고 결국 사과한 사건이 있었다. 페란테(그가 실제로 아니타 라야이든 아니든)는 가티의 보도에 대해 아무런 논평도 내놓지 않았다. 그동안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익명의 자유가 자신의 글쓰기에 필수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 독자들은 가티의 보도로 인해 페란테의 작품을 더는 볼 수 없지 않을까 우려하며 외친다: 엘레나 페란테를 내버려둬라!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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